거친 질감으로 그려낸 '팬데믹 속 무기력'

입력 2021-03-30 17:02   수정 2021-03-31 01:24


지난해 인천의 한 유원지를 찾은 한국화가 유근택(56·성신여대 교수)을 반긴 것은 무성한 잡초였다. 코로나19로 사람이 떠난 자리는 보도블록을 뚫고 거칠게 솟아오른 잡초가 차지하고 있었다.

“보도블록과 시멘트 사이를 뚫고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를 보니 ‘살아있음의 수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시기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고로움에 우리 청춘들과 중년, 인간사가 겹쳐보였죠.”

이렇게 탄생한 것이 ‘생.장’ 연작이다. ‘생.장-청춘’에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키만큼 자란 잡초더미에서 마스크를 쓴 채 손을 잡고 있다. 사회에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든 상황에서 감염병의 악재까지 맞닥뜨린 청춘들이 겪는 성장통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생.장-나’는 50대 중반에 접어든 작가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이제는 쉬고 싶은 마음이 엇갈리는 자신을 서 있는 남자와 그로기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나란히 뉘어 표현했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근택 개인전 ‘시간의 피부’는 팬데믹이 드러낸 인간의 무기력함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출품된 회화 56점에는 그 사이 작가가 맞닥뜨린 정치·사회적 격변이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담겨 있다.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작가에게 코로나19는 더욱 강렬했다. 한국이 코로나19에 잠식되고 있던 지난해 봄,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레지던시(입주작가 프로그램)로 건너갔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셧다운’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언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던 그때 떠올린 것이 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유품을 태운 뒤 남은 재를 보며 조형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신문을 태우고 남은 재를 통해 그때의 조형적 이미지를 다시 한번 떠올렸지요.”

‘시간’ 연작은 코로나19로 터져나온 사상 초유의 사태를 기록한 신문이 타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신천지발(發) 대구 집단감염, 유럽 봉쇄 등의 뉴스가 재와 함께 그의 그림에 남았다. 총 7점의 연작은 점차 타들어가는 신문을 시계방향으로 보여주며 시간이 가진 절대적 운명성과 극적인 연속성을 드러낸다.

철책을 배경으로 만찬장의 한 장면을 담은 ‘오랜 기다림’ 연작은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들이 떠나고 남은 식기와 테이블에서는 당장이라도 남북관계가 해결될 것 같던 설렘,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좌절까지 롤러코스터를 탔던 남북관계가 남긴 쓸쓸함이 배어난다.

이번 전시는 2017년 현대갤러리 전시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다. 한지와 수묵으로 물성을 탐구하던 그의 작업은 한층 깊고 다채로워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묵 대신 채색을 선택했다. 여섯 겹으로 배접한 한지 위에 전통 채색화 안료인 호분과 서양화 물감인 구아슈를 섞어 발랐다. 물감을 빨아들이는 한지 덕분에 그의 작품은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힘을 뿜는다.

그 위에서 쇠솔로 드로잉을 하듯 긋고 긁기를 반복한다. 그의 손길을 거치며 종이의 섬유질은 생명을 얻고 기세를 뿜어낸다. 힘찬 터치와 거친 마티에르는 팬데믹으로 무기력해진 우리 내면의 우울함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한다. 전시는 5월 23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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