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에 '디지털 감성' 입힌 혁신전도사 "CEO에 가장 필요한 건 트렌드 읽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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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3-30 17:36   수정 2021-04-07 18:23

제조업에 '디지털 감성' 입힌 혁신전도사 "CEO에 가장 필요한 건 트렌드 읽는 눈"


“회장님, 혁신하고 있습니다.”

김해련 태경그룹 회장이 최근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마주친 한 직원은 “안녕하세요”란 말 대신 무심결에 이렇게 외쳤다. 2014년 회장 취임 이후 입이 닳도록 혁신을 강조하다 보니 어느새 이 같은 기업문화가 몸에 밴 결과다. 김 회장은 지금도 매달 사내 인트라넷에 직접 글을 올리며 혁신을 강조하곤 한다. 그에게 혁신은 여느 기업에서 강조하는 상투적인 혁신보다는 좀 더 절박한 구석이 있다.

아버지 김영환 회장이 창업해 40년간 이끌어온 무기화학 기초소재 기업 태경그룹에 김 회장이 2012년 부회장으로 처음 입사했을 때 보수적인 기업문화에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눈에 태경그룹은 변화를 싫어하는 공무원 조직과 비슷한 보수적인 문화가 팽배해 있었다. 활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김 회장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기업문화였다. 당장 바꿔야 했다.
대대적인 조직 혁신 단행
김 회장은 2016년부터 대대적인 임원 교체와 축소, 조직 개편 등을 단행했다. 태경그룹의 문화를 더 이상 공무원 조직처럼 남겨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혁신과 소통, 데이터경영, 연구개발(R&D) 등 네 가지를 기준으로 인사평가를 시행해 이를 실천하지 못한 임원들을 교체했다. 그 결과 아버지와 함께했던 임원들 가운데 60%가량이 바뀌었다. 그룹 전체 임원 수도 30% 줄였다.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결재라인은 빠른 의사결정의 걸림돌이었다. 10여 개 계열사를 사업시장별로 단순하게 나누고 결재라인을 줄인 것은 물론 회장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체계도 갖췄다.

김 회장이 혁신을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삶을 살아온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국내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명문대학인 FIT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아드리안느라는 의류업체를 세웠다. 디자이너이자 사장으로서 맨손으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입점하며 10년 동안 회사를 키웠다. 외환위기 속에 회사를 정리했지만 1999년 국내 첫 e커머스 업체 패션플러스를 설립했다. 인터넷 쇼핑으로 의류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굴지의 유통업체들이 인수를 제안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다.

태경그룹에 입사하기 전엔 대우그룹 산하 트렌드연구소인 인터패션플래닝을 인수하면서 트렌드를 분석하고 브랜드를 론칭하는 컨설팅을 수행한 이력도 있다. 《히트트렌드 전략》이란 책을 쓴 트렌드 전문가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매일 신문을 읽고 기술 트렌드를 읽는다”며 “오랫동안 트렌드 분석과 브랜드 컨설팅을 하다 보니 이제는 트렌드를 읽는 눈이 생겼다”고 했다.
트렌드에 밝은 제조업 경영자
무기화학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전통 제조업을 경영하면서 트렌드 변화에 민감한 경영자로 꼽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마켓컬리가 새벽배송 서비스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며 e커머스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다. 김 회장은 신문지상 등을 통해 이 같은 소식을 접하면서 식음료 전용 드라이아이스가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다. 신선식품을 새벽배송하기 시작하자 드라이아이스 수요가 늘어났다. 드라이아이스는 이산화탄소를 얼려서 만든다. 그 당시엔 산업용 이산화탄소와 식품용 이산화탄소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제조했다.

김 회장은 “요즘 소비자들이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한 제품을 사용하길 원한다는 트렌드에 주목했다”며 식품용 이산화탄소로만 제조한 드라이아이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존 드라이아이스와 차별화한 식음료 전용 드라이아이스 ‘세이프 프레시너’가 탄생했고 2년 전부터 마켓컬리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후 쿠팡까지도 고객사로 확보했다. 태경그룹은 지난해 드라이아이스로만 70억원 이익을 냈다.
스마트팩토리 전면 도입
김 회장은 평소 “최고경영자(CEO)는 디지털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산현장에 스마트팩토리를 전면 도입한 것은 물론이고 인사관리와 영업활동도 데이터로 관리하도록 했다. 김 회장은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기업 경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했다.

그 가운데 데이터경영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스마트팩토리 분야다. 무기화학과 기초소재를 제조하는 공장에서는 최적의 생산 조건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다양한 원료를 배합해 여러 연료를 태워 고온·고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온도와 압력을 조절하는 게 변수다. 스마트팩토리는 이 같은 변수에 따른 제품 생산 결과를 축적해 최적의 생산 조건을 도출해낸다.

김 회장은 ‘스마트팩토리 리더스 정기 모임’을 신설해 그룹 내 스마트팩토리를 잘 활용하고 있는 공장 사례를 전 공장이 공유하도록 했다. 2019년 태경산업의 강원 예미공장에서 망간합금철을 생산하는 설비에 스마트팩토리 장비를 설치 완료했고 그 자료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30여 개 공장에 스마트팩토리 설치와 운영을 확산시키고 있다. 김 회장은 “1년 동안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적용하면 원가 절감을 달성할 수 있다”며 “태경산업의 충북 단양공장에서 그 효과가 컸다”고 했다.
잠시도 쉬지 않는 활동가
김 회장은 가만히 있는 걸 못 참는 스타일이다. 출장에 동행하는 직원들이 그의 빠듯한 일정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다. 일과도 빠르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신문을 읽으면서 사업 구상을 한다. 유일하게 휴식시간을 보낸 게 둘째를 임신했을 때의 1년 정도다. 그는 “정체되는 순간은 왠지 세상과 분리되는 것 같다”며 “변화하지 않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공장을 방문하는 경영 습관도 이 같은 기질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활용해 전국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소통하는 것도 그가 중시하는 경영 원칙 중 하나다. 2019년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단양, 전남 여수 등 전국 각 계열사의 공장을 방문해 임원을 제외한 과장급 이하 직원들과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는 ‘통통미팅’을 열고 있다. 통통미팅에서 나온 제안을 반영한 결과 캐주얼 복장으로 출근할 수 있게 바뀌었고, 각종 동아리에 대한 지원도 확대됐다. 김 회장의 목표는 태경그룹을 세계적인 소재기업 독일의 바스프처럼 키워내는 일이다. 김 회장은 “제품 경쟁력이 뛰어나 독점지위에 오를 수 있는 소재를 다수 보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 김해련 회장은

△1962년 서울 출생
△1980년 창문여고 졸업
△1984년 이화여대 경영학과 졸업
△1986년 뉴욕페이스대 경영학 석사
△1988년 뉴욕 FIT 패션디자인학과 졸업
△1989~1999년 아드리안느 대표
△1999~2012년 패션플러스·인터패션플래닝 대표
△2012~2014년 태경그룹 부회장
△2014년~ 태경그룹 회장
△2018년~ 중견기업정책위원회 민간위원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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