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건희 컬렉션에 쏠린 눈

입력 2021-04-11 17:14   수정 2021-04-12 00:40

국보 제294호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의 첫 거래가는 1원이었다. 1920년대 초 서울 을지로. 기름을 파는 행상이 을지로의 일본인 단골 여성에게 참기름을 권했다. 가격은 4원. 단골은 기름병이 예쁘다며 병도 팔라고 했다. 병값 1원을 더해 5원에 거래가 이뤄졌다.

일본인 단골의 남편은 골동품상이었다. 주인이 바뀌면서 백자 가격은 60원, 600원으로 뛰었고, 1932년 경성구락부 경매에선 3000원에 낙찰됐다. 4년 후 다시 경성구락부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의 낙찰가는 1만4580원. 일본인 고미술상과의 치열한 경합 끝에 당시 서울 기와집 15채 값을 ‘지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마지막 주인이 됐다.
쉽지 않은 길, 컬렉션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이렇게 모은 작품들의 집이다.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은 기와집 25채 값(2만5000원)을 주고 샀다. 영국인 수집가 개스비가 모은 명품 청자 20점을 기와집 400채 값에 해당하는 40만원에 일괄 인수해 전세기로 싣고 온 일화도 유명하다.

컬렉션은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둘 쌓이고 완성된다. 미술품을 수집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수집하는 건 아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 노력에다 무엇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윤장섭 전 유화증권 명예회장이 설립한 호림박물관, 안병광 유니온제약 회장이 설립한 석파정 서울미술관, 서성환-서경배 회장이 대를 이어 수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유상옥 회장의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코리아나화장박물관과 미술관 등 수많은 민간 박물관, 미술관이 컬렉터들의 숨은 노력으로 탄생했다. 컬렉션을 부자들의 취미 놀음쯤으로 삐딱하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난해 10월 타계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과 문화재,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미술계는 물론 문화계의 큰 관심사다. 이달 말로 예정된 삼성의 상속세 신고를 앞두고 1만3000여 점, 3조원 규모로 알려진 이 컬렉션의 명품들, 특히 현대미술 걸작들이 10조원대 상속세 납부를 위해 해외로 팔려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컬렉터의 노고 헛되지 않도록
피카소, 모네, 르누아르, 샤갈, 자코메티, 리히터 등 수많은 현대미술 대가의 걸작은 세계 시장에서의 거래가가 워낙 높아 한 번 나가면 국내에서 다시 보기 어렵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그간 논의는 분분했다.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내는 물납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나 아직 뚜렷이 잡힌 건 없다. 지금 법을 만든다고 해도 이건희 컬렉션은 적용받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컬렉션을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방안, 정부가 부지를 제공해 전용 미술관을 짓는 방안 등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건희 컬렉션의 감정을 맡은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 등 3개 단체는 이달 말 제출할 감정평가보고서를 작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를 통해 들리는 바로는 삼성이 컬렉션의 작품들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문화계의 기대와 희망이 부담스럽겠지만 이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컬렉터의 노고가 헛되지 않을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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