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싱가포르 정치 바꾼 2030

입력 2021-04-16 17:52   수정 2021-04-17 00:12

싱가포르 집권 인민행동당(PAP)이 초유의 리더십 혼란에 빠졌다. 후임 총리 지명자인 헹스위킷 부총리가 총리직을 넘겨받지 않겠다고 지난 8일 선언했기 때문이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이후 불과 3명의 총리만 있었지만, 차기 총리 지명이 투자자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전통인 점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헹 부총리는 2019년 부총리에 지명된 이후 리셴룽 현 총리에 이어 싱가포르를 장기간 통치할 4세대 지도자로서 굳건한 지위를 인정받아왔다. 리 총리는 국부로 불리는 고(故) 리콴유 총리의 장남으로, 고촉통 총리에 이어 2004년부터 싱가포르를 통치해왔다.

리콴유의 수석비서관 출신인 헹 부총리는 총리직 포기 이유로 올해 60세인 자신의 나이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확산이라는 비상시국 수습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땐 더 젊은 총리가 국정을 이끄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리 총리는 “헹 부총리의 의사를 존중한다”며 머지않아 새 후임자를 지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앞서 리 총리는 70세를 맞는 2022년 이전에 총리직을 이양하겠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정권 안정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퇴임 시기가 불확실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수의 전문가는 헹 부총리의 결심을 이끈 배경을 작년 인민행동당의 부진한 총선 성적에서 찾고 있다. 인민행동당은 지난해 7월 총선에서 2015년 대비 8.6%포인트 떨어진 61.2%의 표를 얻었다. 55년 집권 사상 세 번째로 낮은 득표율이었다. 반대로 야당은 전체 93석 중 역대 최다인 10석을 얻는 이변을 일으켰다. 차기 지도자로 낙점받은 헹 부총리가 출마한 이스트코스트 집단선거구(GRC) 득표율은 더 실망스러웠다. 야당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53.4%의 표를 받는 데 그쳤다. 코로나19 방역 성공과 대규모 재난지원금 방출로 높은 지지율을 기대했던 여당은 뜻밖의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표심의 가장 큰 변화는 젊은 유권자 사이에서 일어났다. 젊은 세대가 많이 사는 선거구일수록 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 젊은 유권자는 정부가 소득 불평등의 빠른 해소와 기회의 공정성 확대 등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총선 결과를 놓고 볼 때 인민행동당이 지지 기반을 되찾으려면 더 지도력 있는 차기 총리를 찾기보다 시대적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50년 넘는 1당 지배체제의 강력한 버팀목이었던 리콴유의 경제 성장 유산만으로는 젊은 세대를 만족시키기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마사고스 줄키플리 싱가포르 사회가족부 장관은 올해 초 한 정부 행사 연설에서 “독립 이후 겪은 50년과 앞으로 50년 동안 우리가 직면할 사회적 환경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며 “불평등을 방치할 경우 분열과 응집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싱가포르 청년 세대의 불만은 코로나19 전후의 소득 불평등 확대가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유지해온 나라에까지 첨예한 화두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더욱 이목을 끌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장기간 고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면서 국민으로부터 높은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주택 구입 부담을 크게 낮춘 ‘99년 임대’ 공공주택 정책은 주택보급률을 90%로 끌어올리며 주거 안정을 지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빵과 버터’만으로는 유권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연애·결혼·출산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한국 청년 관점에선 박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와 달리 취업난은 심각하고 부동산 가격 급등은 청년을 ‘벼락거지’로 만들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비리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지켜본 젊은 유권자의 이런 분노는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국가부채가 선심성 지원금과 질 낮은 공공 일자리 만들기로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소득 불평등 해소와 기회의 공정성 목소리를 높이는 미래 세대에 과도한 나랏빚까지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일상 빠르게 회복하는 싱가포르
싱가포르가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일상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마스크 착용과 8명 초과 모임 금지 등 여전히 엄격한 방역수칙을 따라야 하지만, 작년 말부터 지역 내 신규 확진자가 없는 날이 더 많아져서다.

싱가포르 보건부(MOH)는 지난 2주 동안 지역 내 확진자 수가 주당 평균 2명이었다고 16일 발표했다. 다만 해외 입국자 격리 숙소에선 하루 10명 안팎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주로 방글라데시,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다.

경제활동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지난 1분기 싱가포르의 국내총생산(GDP)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0.2%(예비치) 늘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첫 전년 동기 대비 증가세다. 싱가포르 경제는 지난해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에 따른 충격으로 5.4% 역성장했다. 지난 6일 기준 전체 인구의 약 20%인 113만여 명이 코로나19 백신 1회분 이상 접종을 마쳤다. 모더나 또는 화이자 백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맞을 수 있다고 MOH는 지난 13일 공지했다. 화이자 제품은 작년 12월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들여왔다.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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