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을 퇴직연금 고른다는데…증권·금융사가 머리채 잡는 이유[이슈+]

입력 2021-04-27 12:25   수정 2021-04-27 23:48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이 임박한 가운데 도입 방식을 놓고 여야의 대치가 첨예한 상태다. 여당은 수익률을 올리겠다는 취지에 맞게 금융투자업계와 입장을 같이하고 있는 반면, 야당은 은행·보험업계와 함께 원금보장 상품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야의 법안 공방전이 관련업계의 대리전 양상을 띄고 있는 셈이다.

27일 당정에 따르면 국회에서는 내일(28일) 현행 퇴직연금 제도에 디폴트옵션 도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두고 간담회가 열린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간부를 비롯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은행, 보험, 금융투자 등 관련업계 그리고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들까지 나와 토론회를 연다.
퇴직연금 수익률 1%대인데…운용 수수료는 0.42%
현재 제출된 개정안은 크게 두 가지다. 지난 1월 고용노동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의원입법 형식으로 발의된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과 지난달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다.

안 의원과 김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노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까지 하락한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자는 취지가 반영됐다. 근로자들이 선택하는 퇴직연금 확정기여형(DC형)에 별도로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사전에 지정한 타깃데이트펀드(TDF), 혼합형펀드 등으로 운용되는 근거 조항을 담았다.

입법이 순탄할 것으로 예상됐던 법안은 지난달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디폴트옵션 대상으로 '원리금 보장 상품'을 추가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윤 의원은 원금손실 우려 등의 이유를 들어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상품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는 이번 토론회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여야의 주장과 증권·금융업계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모두 '근로자의 든든한 노후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포장을 벗겨보면 업계의 민낯이 드러난다. 디폴트옵션을 통해 가입자가 실적배당형 상품을 선택하면 자금은 금융투자업계로 주로 흘러가고, 원금보장형을 지정하면 금융업계로 자금이 옮겨진다. 이렇게 지정돼 이동한 자금은 운용사(혹은 직접운용)가 운용하게 된다. 돈이 들어오고 운용을 할 수 있다는 건 '수수료'를 벌 수 있다는 얘기다.

퇴직연금 시장은 가입액이 255조원을 넘었고, 개인형 퇴직연금도 100조원을 돌파했다. 이렇게 거대해진 시장인만큼 '수수료'도 수조원에 달한다. 문제는 가입자들은 금융지식이 부족하고 시간이 없고 생업으로 분주하다는 점이다. 가입자들은 '수익률'만 의식할 뿐 '수수료'에 대해서는 인지를 못하는 게 보통이다. 이처럼 수조원의 시장임에도 돈을 맡긴 가입자들은 까다롭지 않다보니, 낮은 수익률에도 퇴직연금은 꾸준히 몸집을 불리고 있다.

퇴직연금에는 운용관리수수료 자산관리수수료가 부과되고 있다. 금융감독원 발표자료에 따르면, 금융회사들의 연평균 수수료는 0.42% 수준이다. 지난해 원금보장형 퇴직연금 상품 연평균 수익률은 1.68%에 불과했으니, 이 중 25% 가량을 수수료로 가져가는 셈이다. 이 수수료는 가입자의 만족도나 수익률 등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부과된다.
증권사들 "너무 안일한 운용…개인들도 주식투자 다들 하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증권회사를 비롯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퇴직연금에 선진국들이 도입한 디폴트제도도 도입도 안했으면서, 기존의 금융사들이 낮은 수익률에 높은 수수료를 챙겨간다고 봐서다.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에게 "가입자들이 체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존 금융사들은 퇴직연금 장사로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작 1%대의 수익률을 안겨주면서 절반을 떼간다니 기가 막히다"며 "거래수수료가 거의 없을 정도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증권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서든 수익을 올려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중견 자산운용사의 임원은 지난해 증시 활황과 함께 개인들이 운용한 예를 들면서 "가입자들이 퇴직연금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고도 했다. 그는 "과거에 퇴직연금은 묻어두는 돈이었지만, 이제는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개념으로 진화했다"며 "이는 선진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형태"라고 설명했다.

실제 금감원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0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DC형 퇴직연금 적립금 증가율은 16.3%(9조4000억원), 개인형퇴직연금(IRP) 증가율은 35.5%(9조원)로 확정급여형(DB형)의 증가율인 11.5%(15조9000억원)을 앞질렀다. 저금리 상황에서 증시가 상승하면서 가입자들은 직접 운용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원금보장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보험회사들이 주식에 투자하는 '변액보험'을 100조원 넘게 판매했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퇴직연금은 정부의 규제를 받다보니 변액보험펀드처럼 연 10%씩 사업비를 챙기기 어렵다"며 "말로만 가입자를 위한 것이라고 할 뿐, 실상을 들여다보면 수수료에 운용수익까지 챙기려는 속셈"이라고 귀띔했다.

보험업계에서는 가입자의 선택권을 주장하고 있다. 정원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입자마다 변동성에 대한 위험회피성향이 다르므로 운용지시를 하지 않는 가입자의 자산을 임의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가입시키는 것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영 키움투자자산운용 퇴직연금컨설팅팀 이사는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을 계기로 금융회사는 가입자의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한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며 "금융회사는 근로자의 노후소득 확대라는 중·장기적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양질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후 대비를 위한 연금 이해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가 발간한 2021 대한민국 직장인 연금이해력 측정 및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의 연금이해력 점수는 400점 만점에 평균 190.5점(100점 만점에 47.6점)에 그쳤다. 정나라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선임연구원은 "연금의 운용·인출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고, 다양한 연금을 아울러 활용하는 능력도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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