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차를 보지만, 여자는 옷과 핸드백을 봅니다”. 패션업계에 오래 종사한 기업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었다. 모임에 나갔을 때 타인의 무엇에 시선이 꽂히는 지에 관한 그만의 ‘이론’이자, 왜 골프웨어(골프복)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지를 그는 ‘비교’ 개념에서 풀어나갔다. 해외 여행길도 막히고, 각종 사교 모임이 원천봉쇄된 탓에 골프장이 거의 유일한 타인과의 ‘비교 공간’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패션은 문화와 관습의 축적물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는 옷을 입는 양식에 흔적을 남긴다. 암울한 군사 독재 시절, 여성들의 미니스커트는 통제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반항이었다.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도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발목에 고무줄을 집어 넣은 일명 조거 팬츠를 입고, 흰 양말을 바지 위로 덮어 신는 등 집에서 입던 편한 일상복이 유행인 양 2030세대를 열광시키고 있는 것은 ‘집콕’ 생활이 길어지고, 생활 범위가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 일이 흔해진 데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골프웨어의 성장은 숫자로도 가늠해볼 수 있다. 레저산업연구소은 올해 골프웨어 시장 규모가 작년보다 약 10% 성장한 5조6800억원로 예상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고가 골프웨어의 성장세가 뚜렷하다.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 ‘빅3’가 지난해 판매한 골프웨어 매출은 약 9000억원 규모였다. 올해는 1조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1위 백화점인 롯데만 해도 올 1분기 전체 매출에서 골프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2.8%로 전년 같은 기간 (2.3%)보다 0.5%포인트 늘어났다. 금액으로 치면 수백억원 규모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의류와 신발 등을 포함해 아웃도어 전체 매출 비중이 대략 5%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골프복의 성장세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 역시 올 1분기 골프웨어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82.9%, 92.5% 성장했다.
패션업체들은 저마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혈안이다. 코오롱FnC는 지난해 ‘지포어’라는 미국의 브랜드를 수입해 시쳇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등 서울 주요 백화점에서 시범 매장을 연 결과 한 달 매출이 5억원에 육박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타이틀리스트어패럴 등 소위 잘나가는 브랜드들도 한달 매출이 3억원을 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포어의 성공은 타이틀리스트, PXG 등 골프장비 업체들이 만든 기능성 골프웨어가 아니라 ‘순수’ 캐주얼 의류가 내놓은 골프복이라는 점에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하이엔드(고가) 골프웨어 시장은 해외 브랜드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폴로’도 골프 브랜드 출시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브랜드들이 골프웨어 라인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 및 패션업계에선 일명 에루샤(에르메수·루이뷔통·샤넬)로 불리는 명품 브랜드들이 골프웨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백화점은 로열티(충성도) 높은 VIP 고객을 중심으로 영업하는 곳”이라며 “이들은 브랜드를 따로따로 입지 않고, 하나의 브랜드로 통일해서 입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하이엔드 제품에 대한 가격 상한선이 계속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비쌀수록 좋아보이는 ‘베블렌의 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토종 브랜드들도 여전히 선전하고 있기는 하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중저가 시장에선 여전히 JDX, 루이까스텔 같은 한국 브랜드들이 대세”라며 “매출 면에서도 JDX가 연간 2000억원을 웃돌지만 백화점 인기 브랜드들조차 1000억원을 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타이틀리스트와 PXG 의류의 인기는 각각 아퀴시네트코리아와 PXG코리아가 사실상 시장을 창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PXG만 해도 2017년에 어패럴(의류)를 국내 수입사가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타이틀리스트도 마찬가지다. 최근엔 한류 붐을 타고 미국 등 골프 선진 시장에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2010년 초반까지 토종 골프 브랜드들이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영주, 이동수 등 디자이너의 이름을 건 토종 브랜드들이 만개했다. 빈폴(삼성물산 패션부문, 1989년 첫 선), 해지스(LF, 2000년) 등 대기업 계열의 브랜드들이 골프복을 선보이면서 고가 골프복 시장을 이끌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으로 치면 패션업계의 R&D(연구·개발)는 신진 디자이너 발굴”이라며 “한국 브랜드들이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트렌드를 못 따라간 탓이 크다”고 말했다.
닥스, 해지스 등을 운영하는 LF는 닥스골프에 대한 전면 ‘리뉴얼’ 작업을 단행하는 등 골프사업 부문에 대한 역량 강화에 나섰다. 로고도 새로 만들었다. 영국 본사가 글로벌 최초로 한국에서 이 로고를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여전히 5060세대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빈폴골프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기존의 충성도 높은 고객이 이탈할 수도 있다는 점이 한국 브랜드들이 쉽게 변화의 대열에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백화점 업계에선 신진 디자이너 골프복에 주목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얻은 인기에 힘입어 백화점 매장까지 진출한 페어 라이어가 대표적이다. 한섬 창업자인 정재봉 사우스케이프오너스클럽 회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선보인 골프웨어 브랜드인 사우스케이프도 ‘숨겨진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동휘 기자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