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에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가정(What if)’이 없다면 역사는 박제물일 뿐,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라가 주도한 이른바 삼국통일은 불완전했지만 의미가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전개된 역사를 살펴볼 때 고구려가 민족통일을 했다면 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고구려에 대패한 당태종은 648년에 죽고, ‘고구려 멸망’이라는 숙명적인 중국의 과제는 고종이 이어받아 659년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660년 음력 7월 초,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와 1900여 척의 함선(삼국유사)이 산동반도의 성산항을 출항했다. 서해를 횡단한 수군은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대기하던 신라 함대 100척과 합류한 뒤 백제의 경기만과 당진·홍성·군산 등 해안에 상륙했다. 주력군은 금강하구 전투를 끝내고 수륙양면군으로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이 무렵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한 계백 장군은 나당 상륙군과 협공하려는 김유신의 5만 군대를 저지하다가 황산벌에서 산화했다. 백강과 탄현 방어를 간언한 성충과 흥수라는 전문가를 배척한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다.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왜국은 정세 판단의 미숙과 해전 능력 부족 때문에 파병이 더뎠다. 일본 천황(이하 역사서 명칭에 따름)이 661년 2월 규슈 북부에 도착해 임시관청을 설치하다 죽고, 뒤이어 아들 덴치(훗날 천황)가 8월에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보냈다. 9월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5000명의 군사와 함께 귀국해 백제부흥운동을 이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이렇게 한민족 전체가 동아시아 질서재편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663년 나당 연합군은 본거지인 주류성을 점령했고, 백·왜 동맹군은 웅진강 입구에 방어책을 세웠다. 8월,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백강은 《일본서기》에는 백촌강이라 기록돼 있으며, 금강설·홍성설·동진강설·부안설 등도 있다. 당나라는 170척으로 진을 쳤고, 왜군은 1000척으로 백강 근처 백사에 대기하고, 백제군은 언덕에서 배를 지켰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400여 척의 전선이 불타고, 2만7000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복국군 왕인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했고,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으나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이렇게 한민족 전체가 동아시아 질서재편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