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 "한번 꽂히면 직진…틀 갇히면 혁신은 없다"

입력 2021-05-11 17:40   수정 2021-05-12 02:34

2002년 5월 서울 광화문의 조그만 사무실에 ‘고영테크놀러지’ 현판이 걸렸다. 로봇 엔지니어 출신 고광일 대표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며 세계를 석권할 제품을 만들자”며 창업에 나섰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을 정한 것도 아니었다. “한번 꽂히면 직진한다”는 평소 입버릇대로였다. 주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 수군거렸다.

다만 고 대표에게 ‘히든카드’는 있었다. 1980년대부터 로봇 개발에 함께 매진해온 동료들이었다. 고 대표의 창업 소식에 금성사(현 LG전자) 중앙연구소 로봇팀 등에서 인연을 쌓은 10여 명이 사표를 내고 합류했다. 창업 전선에 함께 나선 이들은 로봇과 관련된 시장이 원하는 제품이 무엇일까를 치밀하게 연구했다.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합숙을 밥 먹듯 하는 나날이었다. 말하자면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로봇에 미친 사나이들이었다.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쳇말로 ‘무데포’ 기질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알면 도전을 못하죠.”

불과 1년 만에 고영은 인쇄회로기판(PCB)에 납이 제대로 도포됐는지 검사하는 ‘3차원(3D) 납도포검사장비(SPI)’를 세계 최초로 내놨다. 2차원(2D) 화면 검사나 육안 검사에 의존하던 시절, 반도체는 물론 전자제품의 불량률을 제로(0)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획기적인 로봇 장비였다. 품질이 알려지면서 독일 지멘스, 보쉬 등이 앞다퉈 고영의 제품을 사 갔다. 고영은 3D SPI를 기반으로 2006년부터 현재까지 15년째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세상에 없는 제품만 개발한다”
고 대표는 세상에 없는 제품을 내놓는 것을 개발 원칙으로 삼고 있다. 혁명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엔지니어의 사명이란 생각에서다. 그는 “원래 성격이 남과 다르게 하는 걸 좋아하고, 남 따라 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했다. 경쟁자들을 좇지 않는 ‘퍼스트무버(first mover)’야말로 엔지니어의 자존심이라는 것이다. 회사 설립 때 정한 경영이념도 ‘새로운 기술로 인류를 이롭게 하자'는 뜻에서 ‘홍익인간’으로 지었다.

고영은 첫 주력 제품인 3D SPI에 이어 회로기판에 납이 도포된 이후 반도체 부품과 납도포를 모두 검사할 수 있는 3D 부품 실장 검사장비(AOI)도 2010년 세계 최초로 내놨다. 고생스럽기 그지없는 퍼스트무버의 대가는 달콤했다. 고영의 제품 단가는 경쟁사보다 20~30% 비싸지만,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한다. 성능과 품질이 그만큼 우수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파고드는 기질은 학창시절 때부터 싹이 보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을 해설서대로 풀지 않고 곧잘 다른 방식으로 풀어 친구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곤 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기술에 빠진 것도 마찬가지다. 고 대표는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당시 AI가 합성곱신경망(CNN) 최신 딥러닝 기술을 쓰는 것을 보고 ‘검사장비에 응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며 “바로 미국 연구소에 회사의 제품 데이터를 보내 AI로 검사하는 기술을 연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고영은 2016년 미국 샌디에이고와 KAIST 내에 ‘AI 연구소’를 설립했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AI 연구센터를 세운 것보다 1년 이상 앞선 시기다. 연구소에선 최신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검사장비가 스스로 제품 불량을 판별하고, 공정을 제어할 수 있는 AI 기반 솔루션을 2018년부터 상용화했다.
“정해진 틀에선 창의적인 결과 안 나와”
수학을 좋아했던 고 대표는 제어공학을 전공했다. 공학 중에 가장 수학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에서다. 로봇 기술의 가능성에 눈뜬 것도 이 무렵이다. 졸업 후 한 국책연구원에서 일하다가 로봇 연구원을 뽑는 금성사의 광고를 보고 그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누구도 로봇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로봇 1세대의 길은 외로웠다. 원서를 읽고, 해외 로봇을 분해해가며 연구했다. 하지만 공부할수록 실력 부족을 느꼈다. 1985년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LG산전(현 LS산전) 연구소로 복귀했다. 동료들과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산업용 기계 등을 만들었다.

그는 기업인이 아닌 연구원으로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선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로 연구팀에서 제안한 제품의 사업화가 더뎠다. 새벽 3시까지 작업한 연구원에게 오전 정시 출근을 요구하는 경직된 행정도 불만이었다. 그는 “열정을 다해 일하는 직원보다 근무시간에 맞춰 칼퇴근하는 ‘땡땡쟁이’들이 승진하는 것을 보고 서운함을 크게 느꼈다”고 했다. 고영에선 ‘자율출퇴근제’를 시행한다. “정해진 틀에 맞추면 창의적 결과물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돈을 못 버는 연구부서는 버티지 못했다. 고 대표는 미래산업으로 둥지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세상에 없는 첫 번째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소형 칩마운터(인쇄회로기판에 정밀부품을 장착하는 장치)였다. 당시 마운터는 일본 미국 독일회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형 트럭만 한 크기가 단점이었다. 고 대표는 책상만 한 신제품을 내놨다. 미래산업은 이후 세계 마운터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나갔다.

고 대표는 훗날 창업에 나선 뒤 마운터 제품을 생산해 팔자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했다. 기업인으로서 ‘의리’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그럴수록 그는 3D SPI 개발에 더욱 매달렸다. 고 대표는 “첫 제품이 한 휴대폰 업체에 팔릴 때까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했다”며 “나중에 너무 고마워서 주식으로 몇 배 이상 돌려줬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꿈을 공유하는 동지”
고 대표는 “리더는 위기의 순간 패닉에 빠져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리더가 의연하지 않고 당황하면 조직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2008년 9월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도 그랬다. 공장, 연구소 가릴 것 없이 일감이 떨어졌고 임직원은 구조조정 불안에 시달렸다. 고 대표는 이때 다시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이번 기회에 투자를 늘리고, 인력도 충원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금융위기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밀린 연구를 보강하며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2010년부터 세계 경제가 회복되며 회사 매출은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직원 간 소통도 그의 주요 관심사다. 정기적으로 ‘비전 공유회’도 연다. 여기서 고 대표는 “회사의 사업 목표에 대해 동지(同志) 여러분께 보고드린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회사의 꿈과 자신의 목표를 일치시킨 직원들이야말로 동지라고 생각해서다.

■ 고광일 대표는

△1957년 충북 청주 출생
△1976년 서울고 졸업
△1980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2년 서울대 제어계측학과 석사
△1981~1983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
△1989년 美 피츠버그대 공학박사
△1989~1997년 LG산전 연구소 산업기계연구실장
△1997~2002년 미래산업(주) 연구소장
△2002~현재 (주)고영테크놀러지 대표이사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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