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車산업, 갑을문화에서 협업문화로

입력 2021-05-12 17:18   수정 2021-05-13 00:11

40년 넘는 직장생활을 자동차산업과 연을 맺어왔다. 그중 22년은 갑(甲)에 해당하는 자동차회사에서, 18년은 을(乙)에 해당하는 부품회사에서 근무했다. 아마도 갑을문화가 가장 명확한 곳이 자동차산업이 아닌가 싶다. 한번 업체로 선정되면 비교적 오랜 기간 안정적 공급권을 확보하기에, 갑과 을의 관계가 선명하게 각인돼 온 것이다.

LG에서 자동차 부품 사업을 일구고 있을 때의 일화다. 한창 전기차와 관련한 부품을 개발하고 납품처도 확정하면서 사업을 확대하다 보니, 언론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LG가 최종 자동차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구본무 회장께서 “이우종 사장에게 호(號)를 하나 선사하지요. 바로 평을도사(平乙道士)랍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의미인즉, 평생 을로 살라는 뜻이었다. 사업의 한계를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정해 주신 것이다. LG는 자동차를 직접 사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을 이렇게 재치 있고 확실하게 전달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자동차산업을 보면 갑을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예견된다. 한 예는 테슬라 및 폭스바겐의 배터리 관련 행사이고, 또 다른 예는 최근의 차량용 반도체 사태다. 지난해 9월 테슬라의 배터리데이 그리고 올 3월 폭스바겐의 파워데이 행사는 배터리라는 한 부품에 대한 자신의 사업 전략을 전 세계에 공표 과시한 행사였다. 참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만큼 전기차 시대에 배터리가 차지하는 위상을 절감케 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최근의 차량용 반도체 사태는 지금의 자동차는 물론 미래의 자동차에도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한 부품인지를 일깨워 주는 사건인 동시에, 반도체와 관련한 공급망이 이제 자동차사가 주도권을 갖고 전통적 갑을관계 속에서 업체 선정, 가격 결정, 납품 관리 등의 구매 활동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과연 미래형 자동차에서 배터리 및 반도체란 부품은 어떤 위상을 차지할 것인가? 이런 전략적 부품을 갖고 있는 소수 부품업체가 판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부품 업체를 ‘초대형부품사’라고 칭한다. 해당 부품의 기술 수준이 매우 높고 장기간의 연구개발을 요하며, 시설 투자도 대규모인지라 가능한 업체 수도 소수일 수밖에 없다. 공급처가 과점 상태인 것이다. 배터리 및 반도체를 비롯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및 센서 등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초대형부품사와의 관계는 갑을문화로는 해결할 수 없다. 소위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자동차사 입장에서는 초대형부품사에 대해 상품기획 초기부터 전략적 협업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술 로드맵을 공유함은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분담하는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품 개발의 일정한 역할을 자동차사가 대행해 주는 방안이 그것이다. 부품 개별 시험과 시스템 통합 시험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초기 물량에 대한 불확실성을 계층화해 구간별로 차별적 가격을 제시하는 ‘층별가변계약’이다. 이런 층별가변계약은 필연적으로 재고관리를 비롯한 생산 시스템의 유연성을 요구하게 돼 관리 비용도 상승할 것이다. 이를 상쇄하기 위한 공용화 바람은 더욱 드세질 것이다. 아울러 자동차 회사 내의 기능 조직 간 간극을 최대한 줄이는 작업도 필수적 요소다. 상품기획, 연구개발 및 구매 조직이 초기부터 혼연일체가 돼 초대형부품사와의 협업 방안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초대형부품사의 등장에 따른 부품공급망 주도권의 불확실성 증대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상호 공유하는 시스템이 선행적으로 정립돼야 한다. 이제, 자동차산업은 갑을문화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공급망 구조의 수직 계열화에서 초대형부품사의 등장에 따른 수평적 협업문화로 탈바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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