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남'이라 잘 나가는 게 아니다…'지휘 왕국' 핀란드서 배울 점 [김동욱의 하이컬처]

입력 2021-05-15 06:00   수정 2021-05-15 07:34


올 3월 유명 음반 레이블인 데카는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이자 프랑스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클라우스 마켈라(Klaus Makela)와 전속 계약을 맺었습니다. 마켈라는 오슬로 필하모닉과 함께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곡 녹음에 들어갑니다. 이미 1번 교향곡 녹음은 음반으로 발매됐습니다. 앞으로 교향시 '타피올라'와 부분만 남아있는 8번 교향곡 녹음도 진행된다고 합니다.

마켈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최근 클래식 음악계에서 핀란드 지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얼마 전 KBS교향악단이 새로운 상임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피에타리 잉키넨을 선임했다고 발표하면서 2019년부터 오스모 벤스케가 이끌고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국내 음악계도 '핀란드 천하'가 됐습니다. 국내 양대 교향악단(KBS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모두 핀란드인 지휘자의 조련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세계 주요 악단의 주요 포스트들을 핀란드 지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영국 BBC심포니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사카리 오라모,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에사페카 살로넨,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산투 마티아스 루발리,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의 미코 프랑코, 핀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한누 린투, 아이슬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에바 콜리카이넨과 앞서 언급한 클라우스 마켈라가 모두 핀란드인입니다. 2019년 7월까지 쾰른 서독일방송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유카 페카 사라스테도 핀란드 지휘자입니다.

중장년층 이상 한국인 클래식 애호가들에겐 김영욱 전 서울대 교수의 청년 시절 음반인 펠릭스 멘델스존과 막스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낯이 익은 오코 카무도 핀란드인 지휘자입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핀란드 지휘자 항목에는 약 50명의 지휘자가 정리돼 있는데 이중 대다수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이웃 스웨덴이 노장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화수분처럼 훌륭한 지휘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양적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핀란드 지휘자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에사페카 살로넨, 클라우스 마켈라, 사카리 오라모 등은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으며 한국의 양대 교향악단을 이끄는 잉키넨과 벤스케 모두 변방에서 활동하는 그저 그런 지휘자가 아닌 1급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잉키넨만 하더라도 네덜란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NDR 함부르크, SWR 슈투트가르트 등과 호흡을 맞췄고 지난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측으로부터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해달라고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과거 한스 크나퍼츠부시, 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그야말로 최고의 지휘자들에게 돌아갔던 역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구 약 550만 명에 불과한 소국 핀란드가 ‘지휘 강국’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많은 전문가들이 탄탄한 오케스트라 인프라를 우선 꼽습니다. 핀란드 교향악단협회에 따르면 전국에서 14개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포함해 31개의 관현악단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민 1인당 오케스트라 수에서 세계 1위입니다. 1993년 제정된 '연극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법'으로 국가와 지자체가 주요 오케스트라를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오케스트라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많다 보니 신예 연주자들도 무대에 설 기회가 많고 자연스레 신인들끼리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선순환 구도가 구축됐습니다.

높은 음악교육 수준도 한몫했습니다. 지휘자가 단지 비트에 맞춰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악보를 해석하고, 프레이즈와 다이내믹, 템포를 조절하고 결정하는 존재인 만큼 다양한 악기와 장르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데 각 분야별로 탄탄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핀란드에선 지휘를 공부하는 대부분 학생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 각 악기 연주를 먼저 배운다고 합니다. 최고 수준으로 악기를 연주할 줄도 모르면서 전문 연주자들 위에서 권위를 갖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라는 설명입니다.

특히 '핀란드 사단'을 일군 요르마 파눌라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습니다. 파눌라는 1973년부터 21년 동안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가르쳤고 현재 세계에서 활약하는 핀란드 지휘자의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입니다. 파눌라는 지휘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하에 모든 것을 손으로 표현하고 전달해야 하며 과장된 몸짓이나 말 많은 것을 배제했다고 하는데요. 지휘 과정을 비디오로 녹화해 학생들이 서로의 비디오를 보며 지휘자가 갖춰야 할 소통법을 배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일군의 천재들이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들이 속출했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르네상스 시기 위대한 미술가와 사상가들을 쏟아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 19세기 말의 오스트리아 빈 등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 지휘의 세계에선 핀란드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려고 도전장을 내민 모습입니다. 각 분야의 훌륭한 인물들이 속출하는 데는 천재적 개인의 등장뿐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 축적된 사회적 노력이 절대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휘자 왕국'이 된 핀란드를 보면서 단순히 "유명한 지휘자가 많네"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아닌, 그 비결을 보고 다른 부분으로 확대 적용할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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