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예버덩 집필실마다 꽃등불…'불후 명작' 꿈꾼다

입력 2021-05-14 18:58   수정 2021-05-15 00:16

비 갠 날 아침, 집필실 문 앞에 노란 꽃다지가 피었다. 마당가 풀숲에서는 모란이 꽃망울을 내밀고 있다. 작약과 큰꽃으아리까지 피니 그야말로 꽃 천지다.

강원 횡성 강림면 주천강 상류, 물이 휘돌아 흐르는 강기슭에 ‘예버덩 문학의 집’이 있다. 예버덩은 옛 들녘(버덩)을 뜻하는 ‘고평(古坪)’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이 버덩에 ‘문학의 집’이 들어선 것은 6년 전.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으로 유명한 시인 조명(趙明) 씨가 5200여㎡(1500여 평)의 땅에 문인들의 창작 공간을 꾸몄다.

건물은 하얀 외벽의 본채 하나와 그 옆으로 적당히 떨어져 있는 방갈로 세 채로 이뤄져 있다. 그 옆 가문비나무 숲에는 야외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도 마련돼 있다. 6년간 이곳에 살다 간 문인은 170여 명에 이른다. 장르별로는 시인이 많고 그 다음이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순이다. 대부분 2~3개월씩 머물며 작품을 쓰고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해에는 이곳에서 28명이 시집·소설·산문집 20권과 신작 177편을 발표했다. 시인 염창권 씨는 시집을 두 권이나 완성했다. 홍일표 석미화 씨도 시집을 펴냈다. 수필가 박명순 씨는 두 개의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극작가 김상진 씨는 창작산실 연극대본 공모에 선정됐다. 조영수 씨는 동시를 세 군데 합동시집에 실었다. 주인인 조명 시인도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민음사)를 출간했다.

다른 행사들은 코로나19 사태로 다 미루고 ‘예버덩 코로나 데카메론’을 두 차례 열었다. 그리스어로 ‘10일’을 뜻하는 보카치오 소설집 《데카메론》은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했을 때 나온 작품. 10명의 청춘 남녀가 감염을 피해 숲속 별장에서 열흘 동안 나눈 이야기를 코로나 시대의 현재와 접목한 행사였다.

시인 염창권 씨가 동서양 고전을 예로 들며 ‘가벼워진 죽음’의 의미로 화두를 던졌고, 시인 김재홍 씨는 확실하지 않은 관념에서 생기는 ‘불안정한 기쁨’을 희망이라고 말한 스피노자를 통해 우리 시대 ‘불안정한 기쁨’의 이면을 얘기했다.


이야기 중간에는 먼저 왔다간 문인들 얘기가 등장했다. 소설가 이명훈 씨가 모란과 작약을 잘 구분하지 못하다가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꽃”이라는 다른 작가의 설명에 “아하!” 탄성을 질렀던 일화가 나왔다. 그 사이로 자작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잎을 차르르 흔드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시나리오작가 겸 영화연출가인 김전한 감독은 이곳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문인들의 일상을 2년째 촬영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다큐영화 제목은 ‘시인들의 집’이다. 이 영화에는 시인 신경림 조명 홍일표 고두현 전동균 천수호, 소설가 이명훈 장마리 이현수, 아동문학가 구지원 씨 등 여러 문인이 등장할 예정이다.

국내외 다큐멘터리 예술영화 중에서 시인과 작가들의 창작 공간을 사계절 내내 담아낸 작품은 아직 없다. 이 영화의 시사회는 올가을께 열릴 전망이다. 머잖아 선댄스영화제 등 국제영화제에 출품될 것이라고 한다.

이곳 예버덩 마당가에는 흔들그네가 하나 놓여 있다. 거기에 앉으면 토마토와 가지 오이 상추 등을 심은 텃밭과 강 건너 마을 뒷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봄 강변에 움트는 갯버들가지와 여름날 빗소리, 가을철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겨울엔 눈 속에 매가 한 마리 커다란 뽕나무 가지에 날아와 앉아 있곤 한다. 그 모습들은 모두 이곳을 다녀간 문인들의 분신이기도 하다.

英 오차드 티가든처럼 사과정원 조성
古典 반열에 오를 작품 산실로
‘예버덩 문학의 집’ 주인인 조명 시인은 “예버덩을 150년 넘는 역사의 영국 오차드 티가든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런던 케임브리지대 인근 그란체스터에 있는 오차드 티가든은 1868년에 생긴 뒤로 케임브리지 학생과 교수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곳은 시인 루퍼트 브룩을 비롯해 수많은 영국 문인들의 창작 산실이기도 하다. 옛날엔 바이런과 밀턴, 버지니아 울프 등이 이곳 그란체스터 마을을 다녀갔다. 찰스 황태자도 여기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즐겼다. 이 정원에는 오래된 사과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조씨는 “예버덩을 ‘책 읽는 사과나무 정원’으로 가꾸려고 작년 봄 사과나무 150그루를 심었다”며 “인위적인 과수원 나무가 아니라 오차드가든의 자연 나무처럼 키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좋은 자연 속에서 매일 심신을 정화하며 창작에 몰입하다 보면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거예요. 세계적인 고전 명작이 한 세 편쯤 나왔으면 해요.”

그는 예버덩 주변이 나물 밭이어서 봄나물을 캐다가 요리를 준비하기도 한다. 그 덕에 작가들은 냉이와 취나물 등 싱싱한 향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가 관찰한 문인들의 특색은 다양하다. 시인들은 낭만적이며, 산책을 많이 하고, 자연과 사물을 유심히 관찰한다. 소설가들은 집필실에 오래 머문다. 밥만 먹고 금방 방으로 들어가 하루 14시간씩 작업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봄날 저녁노을이 질 때나 별빛이 맑은 밤, 바깥 테이블에 모여 차와 술잔을 기울일 때는 모두가 천진스런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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