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官治에 순응하는 금융지주 회장들

입력 2021-05-27 17:35   수정 2021-05-28 00:15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망할 놈의 느림보(Damn, Bloody, Slow)’란 조롱을 받았다. 영업점 창구의 대기 시간이 너무 길었고 관료주의와 불친절함으로 악명 높았다. 그런데 7년 뒤 ‘세계 최고 디지털 은행’(유로머니, 2016~2017년)이란 찬사를 받더니 2019년엔 유수의 글로벌 은행을 제치고 ‘세계 최고 은행’(유로머니)에 올랐다. 요즘은 한국 은행들의 벤치마킹 1순위다.

DBS의 성공 스토리에는 12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피유시 굽타 회장의 디지털에 대한 선견지명과 강력한 리더십이 결정적이었다. 관료주의와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외부 디지털 전문인력을 대거 수혈했다. 2016년 인도 진출 때는 점포 없는 모바일뱅크로 공략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굽타 회장이 취임한 2009년 DBS의 총자산은 1926억달러(약 215조원). 당시 한국 1, 2위를 다투던 KB금융(262조원)과 신한금융(255조원)보다 작은 규모였다. 굽타 회장 재임 11년간 DBS의 기업가치(시가총액)는 256억달러(약 28조원)에서 576억달러(약 64조원)로 두 배 이상 커진 반면 KB금융(23조원)과 신한금융(21조원)은 11년 전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한때 ‘동급’이던 이들 은행에 왜 이런 격차가 생긴 것일까. 한마디로 성장성이다. 디지털 전환과 해외 진출에서 승부가 갈렸다. DBS는 싱가포르를 벗어나 수익의 40%를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거둔다. 99% 내수산업인 국내 은행과는 격이 다르다. ‘우물 안’에서 경쟁하는 국내 은행을 보면 CEO의 역량을 의심해 보기도 하지만, ‘배 놔라 감 놔라’식의 규제 사슬과 관치금융 그림자가 근본적인 병폐라고 봐야 한다.

금융지주 회장들은 늘 좌불안석이다. 겉보기엔 9~10년까지 장수하는 CEO가 나오고 지배구조도 선진화돼 있지만 정권이 바뀌고 금융당국 수장이 교체될 때마다 외풍에 흔들린다. ‘빅4’ 금융지주 중 현 정부에서 당국의 징계 논란과 소송에 휘말리지 않은 곳은 KB금융의 윤종규 회장이 유일하다. 경쟁 은행들이 “KB가 부럽다”고 할 정도로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목숨이 위태로운데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리 없다. 관치에 순응하고, 소신을 접고 적당히 타협하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비대면 시대 점포의 유휴 인력을 전환배치하는 등 인력 재편이 시급하지만 노동조합 눈치를 보느라 엄두를 못내고 있다. 연공서열 호봉제에 발이 묶여 디지털 인재를 수혈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다. 노조와의 마찰과 잡음은 연임에 걸림돌이다. 그래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우회로를 찾는다. 디지털 전환과 혁신에 속도가 나지 않는 이유다.

수십 년 전부터 해외 진출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지만 말뿐이었다. “임기 중 성과가 나지 않는데 굳이 리스크를 질 필요가 있느냐”며 돌다리만 두들기다가 때를 놓쳤다. 현 정부의 신남방정책에 맞장구치며 우르르 동남아로 달려갔지만 실상은 자투리 지역을 놓고 우리끼리 싸우는 꼴이다. 해외 진출은 여전히 구색 맞추기에 가깝다. 1993년 씨를 뿌린 신한베트남은행을 제외하면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전직 은행장이 뼈 있는 농담을 들려줬다. “회장이 되면 스스로 관둘 수가 없어요. 왠지 아세요? 너무 좋아서랍니다.” 회장들은 오너보다 더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은행장들이 임원 인사도 맘대로 못하고 회장의 ‘승인’을 받아야 할 정도다. 회장의 기본 임기는 3년이지만 은행장 등 자회사 대표는 2년 또는 1년이다. 충성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행원에서 출발해 산전수전 다 겪고 행장을 거쳐 회장에 오른 것만으로도 훌륭한 리더의 자격을 갖췄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회장들이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지, 아니면 관치에 순응하며 장수 CEO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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