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와 6명의 '시골시인-K'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1-06-01 10:16   수정 2021-06-01 11:24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본 1990년, 나는 등단을 3년 앞둔 시인 지망생이었다. 영화 제목만 보고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시인은 다 죽었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죽은 시인의 모임…산 시인은 평생 준회원”
원제 ‘Dead Poets Society’의 ‘society’는 일반 ‘사회’보다 특정 목적을 갖고 결성한 협회나 모임, 클럽의 의미로 쓰인 것이었다. 극중 영문학 교사인 키팅이 만든 문학 동아리 이름이기도 하다. 키팅은 “이 모임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살아있는 사람은 평생 준회원 자격만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를 ‘살아있는 시인은 평생 준회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경상도를 거점으로 뭉친 시인 6명
최근에 나온 6인 시집 『시골시인-K』(도서풀판 걷는사람 펴냄)를 읽으면서 그때 생각을 떠올렸다. 시집 제목처럼 시골시인을 자처한 이들은 권상진(경주), 권수진(창원), 서형국(고성), 석민재(하동), 이필(영주/서울) 유승영(진주) 시인이다.

가나다순으로 꼽아본 이들의 공통점은 경상도에서 태어났거나 경상도를 기반으로 활동한다는 것뿐이다. 문학동인도 아니고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도 아니며 회비도 거두지 않는다. 지난해 코로나 와중에 마산에서 만난 이들이 ‘중앙에서 소외된 문인들이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얼마든지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 뭉쳤다.

이 시집에는 각자의 시 10편과 산문 1편, 자화상 캐리커처가 담겨 있다. 제대로 시적 난장을 펴 보자고 의기투합한 이들답게 시편들이 개성적이고 시 정신 또한 치열하다.
권상진 - 정갈하고도 결연한 문장의 빛
권상진 시인은 2013년 등단해 2018년 시집 『눈물 이후』를 펴낸 직장인이다. 그의 시 행간들에는 두 개의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부석거리는 볏짚 자리에 앉아서 촘촘하게 직조해낸 비단 방석의 단아함이라고 할까. 경주에서 공장 노동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의 삶은 볏짚자리에서 시작됐다. 그곳은 ‘밑장 없는 계절에 이력서를 쓰는 밤이 길다’거나 ‘기회는 언제나 뒤집어진 채로 온다’는 구절처럼 그늘진 공간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고급스러운 명주실로 꽃무늬 비단 방석을 짜 내는 데 성공했다. ‘그냥’이라는 시에 나오는 ‘그냥을 바라보며/ 나는 슬픔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너는 그냥에 가만히 기댄 채/ 슬픔에 잘 길들여진 사람이라 대답한다’ 같은 구절이 그곳에서 피어났다.

‘디스코 팡팡’이라는 시도 그렇다. 발랄한 디스코 리듬을 배경으로 무대에서 균형을 잃어야 주인공이 되는 슬픈 현실을 되비추면서 그는 ‘이 장르는 개그가 아니라 생존’임을 일깨운다.

그 생존의 한 방식이 ‘한 손으로 간신히 잡고 있는 밥줄을 놓치지 않으려면/ 남은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식구들의 아슬한 앞섶을 가려 주거나/ 있는 힘을 다해 대롱거리는 순간을 삶 쪽으로 힘껏 당겨 앉혀 주는 일’이라는 점도 함께 보여준다.
권수진 - 한쪽이 추락하면 다른 쪽이 날개를 단다
마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권수진 시인은 인간관계와 삶의 높낮이를 ‘시소’에 비유한다. ‘해 질 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한 쪽이 추락할수록/ 다른 쪽이 날개를 다는 이유를/ 아직 잘 모르고 살아’…

생의 또 다른 단면을 다룬 ‘마을버스’에서는 ‘저마다 동승한 사연은 달라도/ 똑같은 처지에 놓인 똑같은 사람들끼리/ 목적지가 같은 줄도 모른 채’ 종착역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춘(小春)’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도/ 막다른 곳에 봉착하면/ 역류하는 것처럼//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 뿌리내린 그 자리에/ 긴 세월 서 있는 나무도/ 바람이 불때마다/ 수시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이라고 노래한다.

이 모든 풍경의 저편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과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된 ‘그대’가 서 있다. 때로 ‘바람이 불 때마다/ 공명처럼 울리는 그대’는 자신이기도 해서 그의 시는 때로 화려한 벚꽃잔치, 여백 많은 수묵담채화로 거듭난다.

2011년 지리산문학제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 후 2015년 시집 『철학적인 하루』를 낸 그는 “내가 시에 매료된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문학상을 주최하는 대부분의 공모 요강에 적혀 있는 ‘자격 제한 없음’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응시자에게 아무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당선자를 뽑겠다는 공모만큼이나 그의 시는 아무 자격 제한이 없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서형국 - “국경이무너지고 있다”
서형국 시인은 창원에서 태어나 고성에서 연탄불고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부터 몇몇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에 매진 중이다.

가장 먼저 와 닿은 그의 시는 ‘hello’다. ‘이 마을에 닿아 나는 국가가 되었다/ 코끼리 무덤에서 거대한 상아를 훔친 자들이 세운 나라’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그는 ‘슬픔을 이체시키는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보일러 수리공 박씨와 벌침을 놓던 이씨, 도시서 항구를 노래하던 정씨….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벼락을 맞고서야 거머쥔 행운을 누릴 새도 없이 천 개의 인장으로 빼앗긴 대추나무의 사연’에 비유하며 ‘제 몸을 다 태운 그림자처럼 까맣게 웃는 사람들’ 사이로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눈’이라는 시도 눈길을 끈다. ‘어둑한 방파제/ 남녀가 뒤엉켜 있다// 한쪽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한쪽은 손톱으로 목을/ 후벼 파면서// 벌을 받고 있다// 인간이 지를 수 있는/ 극한의 발성을 쥐어짜내며/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 알아듣지 못하는// 벌’이라는 앞부분 11행만으로도 절창이다. 이를 통해 그는 ‘말을 하고 싶은데/ 눈을 떴으므로/ 귀를 덮고// 텅 빈 첫 장에/ 세상에 없는 수화(手話)를/ 새겨야’ 하는 비애의 뒷면까지 그려낸다.
석민재 - 힘을 모으는 법은 맞아보는 게 제일 확실

석민재 시인은 부산에서 하동까지, 낙동강과 섬진강을 넘나들며 시를 쓰고 있다. 2015년 ‘시와 사상’, 2017년 세계일보로 등단해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를 냈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먼저 빨려든 작품은 ‘피아(彼我)’다. 이 시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죽 읽어야 제 맛이 난다.

‘돌을 불에 구워 배꼽에 얹고 자면/ 만사형통한다고// 백 가지를 써봐도 돌이 최고였다고/ 아프지 말라고// 약손처럼 얹어 주던 엄마가 꿈에 온다고/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강에서 돌을 주웠다// 평화하자, 너는 나를 그리고 나는 너를 쓰고/ 우주를 한다, 너와 내가 같은 칫솔로 이 닦고// 춤과 노래가 사라진다 해도 피아에서/ 우리의 엄마가 올 때까지// 돌과 물의 태도가 변한다 해도 피아에서/ 우리가 엄마가 될 때까지’

그의 산문 중 ‘스탠드’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도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팔딱팔딱 살아서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연탄 밑에 연탄처럼 밑불이 되자. 불을 선물하자. 한 줌의 빛이 되자.’
유승영 - 만주라는 변방에서 빛났던 백석처럼
유승영 시인은 서울에서 살다가 진주로 이사했다. 2011년 ‘서정과 현실’ 신인상을 받았고 2018년 시집 『하노이 고양이』를 출간했다. 그는 진주에서 변방의 백석 시인을 자주 떠올린다.

‘백석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한 것처럼, 낯선 공간을 구체적인 장소로 변화시켰던 것처럼 이곳으로, 변방으로의 장소 이동은 나에게 혁명이기도 하다. 나를 바꾸고자 하는 첫 번째 결단이었다. 이곳에서 문학의 자존을 세우고 싶다.’

그는 시 ‘착각의 중심’에서 ‘넘어지는 모든 것은, 중심이 세워져다는 말’과 ‘넘어지는 모든 것들은, 중심이 사라진다는 말’ 사이의 뒤뚱거림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자전거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달아난다/ 마스크가 웃는다 오늘은 마스크를 끼고 웃는 날/ 통장을 해약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라는 구절에 ‘이제 다시 굴러가지 않는 시간’의 그늘을 슬며시 새겨 넣는 솜씨도 뛰어나다.
이필 - “돌을 쪼개 손을 밀어넣어요. 심장을…”
이필 시인은 6명 중 유일하게 서울에 사는 시인이다. 소백산 기슭에서 태어나 2016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의 시에서 발견한 두 개의 빛은 ‘돌’과 ‘별’이다.

시 ‘부석사’의 ‘만약 돌이 공중에서 뜬다면/ 던지세요, 손 안에서 들썩이는 건 당신의 눈빛’이라든가 ‘돌을 쪼개 손을 밀어 넣어요/ 돌의 심장을 꺼내요’ 같은 표현에서 시적 언어의 광휘가 느껴진다. ‘우주오락실’이라는 시에서는 이런 빛을 드넓은 하늘 쪽으로 펼쳐 보인다.

‘천국은 심심한 양털이불/ 주름을 밟고 우당탕탕 천사들이 뛰어가고/ 마지막 한 모금 담배 도넛을 만드는 동안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소매 뒤 감춘 꽁초가 저 멀리 던져질 때/ 아니. 별똥별보다 더 중독된 기분으로/ 물었습니다/ 내 동전만 한 우주는 어디로 굴러갔을까요?’
‘아직 만나지 못한 시골시인들에게’
이들의 합동시집에 발문을 쓴 사람은 마산에 사는 성윤석 시인이다. 그는 ‘여섯 분의 시에 관심이 갔던 것은 밥하고 빨래하고 노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온 손으로 쓴 시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 셋을 억척스레 키우며 낙동강과 섬진강을 넘나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돌연 사람을 만나러 다니겠다고 선언한 이, 서울에서 진주로 내려와 논술 교사를 하면서 오지로, 더 오지로 들어가 시를 쓰겠다는 이, 고성에서 연탄불고기 식당을 하며, 당근마켓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골시인으로 스며든 이…이들은 ‘시골시인 K들’이다.’
경계 없는 의병들, 스스로 국가가 되다
이들 시인 6명은 “‘시골시인-K’를 필두로 ‘시골시인-A’, ‘시골시인-B’, ‘시골시인-C’가 전국 각 지역에서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이 합동시집의 수익금을 다음 시골시인 프로젝트를 위해 후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꿈은 지상의 경계와 국경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이 땅의 변방에서 먼저 일어섰던 수많은 의병의 꿈처럼 이들이 들고 일어선 ‘시적 의병’의 깃발 또한 오래도록 나부낄 것이다. 변방의 백석이 그러했듯, 지역의 시골시인들이 그러하듯,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들이 스스로 ‘준회원’이 되어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듯, 앞으로 더 많은 ‘시골시인’들의 ‘문학적 의병’ 행렬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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