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중국 시진핑의 '세 호구 나라'

입력 2021-06-08 17:37   수정 2021-06-29 00:01

지난 3월 미국 앵커리지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회담. 시작부터 중국 측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2분쯤 가벼운 인사말을 마치자 양제츠 중국 외교부문 대표가 20분간 장광설을 폈다. ‘중국 스타일 민주주의의 탁월함’을 자랑하고 인종차별 등 ‘미국의 죄악’을 꾸짖는 데 거침이 없었다.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이 유럽연합(EU) 대표단을 베이징으로 불러 훈시를 늘어놓은 이후다. “중국식 국가주도 모델의 우수성이 입증됐다. 당신들의 느려터진 의사결정체제는 포퓰리즘을 부르고 있다.”

인권 말살에 주저 없는 권위주의 독재를 ‘효율적 통치체제’라고 우기며 곳곳에서 패권야욕을 드러내는 중국의 행보가 거칠고 대담해지고 있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대표하는 주요 7개국(G7) 정상들이 모레(11일) 영국에서 만나 ‘중국에 대한 공동대응과 결속 강화’를 논의하기로 한 배경이다. 인도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의 정상도 ‘게스트’로 초대받았다. 인구와 경제 규모가 G7 국가 못지않은 데 더해 중국의 ‘완력질’에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게 네 나라의 공통점이다. 대응 방식은 다르다. 호주와 한국은 높은 대중(對中) 경제비중을 의식해 ‘알아서 기다가’ 단단히 약점을 잡힌 대표적 국가로 꼽힌다.

두 나라보다 더 중국에 ‘호구 잡힌’ 국가가 있다. 초청 대상에서 원천 배제된 필리핀이다. 중국의 ‘넓은 품’을 기대하고 온갖 아부에 매달렸다가 오히려 얕잡혀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다. 세 나라의 사례는 중국의 겁박 외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반면교사(反面敎師)로 회자된다. 그중에서도 필리핀이 특히 심각하다. 중국에 정반대 방식으로 대응한 이웃나라 인도네시아와 비교까지 되며 망신살이 더 뻗쳤다. 필리핀은 2013년 6월 헤이그 유엔국제중재재판소로부터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승소하며 중국의 패권야욕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대통령으로 3년 뒤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취임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두테르테는 당선되자마자 “필리핀의 경제발전을 도와줄 나라는 중국이며, 6년의 임기 동안 서방국가들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외교 카드의 패를 몽땅 드러냈다. 취임하기 무섭게 중국으로 날아가 “남중국해 분쟁에서의 승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출신지(민다나오)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 투자 약속 등을 받아냈다. 미국이 그런 행보를 우려하자 “방위협력을 폐기하겠다”고 협박하고 중국에는 배타적 경제수역 내 에너지 자원을 공유하겠다며 더욱 꼬리를 흔들었다.

2019년 팔라완 북서부 해역에서 중국 함정으로 추정되는 선박의 공격으로 필리핀 어부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침공을 당하고도 “중국의 자비를 얻어내려면 순응하고, 우리의 무기력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밑바닥을 드러내자 중국의 대응이 싹 바뀌었다. 투자 약속을 6년째 지키지 않고 있고, 작년 말까지 제공하겠다던 중국산 코로나 백신 지원도 부도를 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인도네시아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며 중국을 길들였다. 2019년 후반 중국군이 남중국해에서 가까운 나투라제도 수역을 침범하자 공군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직접 섬을 방문해 “해사분쟁과 영토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타협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깜짝 놀란 중국은 코로나 백신을 먼저 제공하는 등 환심을 사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호주는 무역 의존도가 40%에 이른다는 이유로 중국의 외교 횡포를 눈감았다가 코가 꿰이는 큰 곤욕을 치렀지만, 최근 정면대응 방식으로 수모를 벗어나고 있다. 중국에 단단히 발목을 잡혀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한국의 대응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가 남은 관심사다. 지난달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등 중국을 견제하는 내용을 공동성명에 담아 주목받았지만, 이후의 행보가 석연치 않다. 중국이 “불장난하지 말라”고 발끈하자 “그런 뜻이 아니다”며 상황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흔들면 흔들린다”는 인상을 주는 게 최악의 외교다. 이틀 뒤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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