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보릿고개와 어머니표 비빔밥

입력 2021-06-08 19:37   수정 2021-06-09 00:20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지금도 종종 가수 진성이 부른 ‘보릿고개’가 TV 채널을 통해 흘러나온다. 주린 배, 물 한 바가지, 초근목피, 어머님 설움, 어머님 한숨이 현실처럼 가슴을 휘젓는다.

일곱 살 이빨 빠지는 나이 때 나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해 6월 절정을 넘어야 했던 우리들 가난의 슬픈 대명사 보릿고개는 진정 사라진 것인가, 더듬어 본다. 그리고 10년일까, 20년일까, 물러서지 않고 찾아오던 질곡의 보릿고개, 그 시절을 이겨낸 어머니표 비빔밥을 다시 상기해본다.

하루 세끼 밥을 모두 챙겨 먹을 수 없는 가난한 때였다. 어머니는 자주 비빔밥을 고집하셨다. 어머니표 비빔밥이라 했다. 이 비빔밥에 동원되는 것은 적은 분량의 밥에 남새밭 상추나 열무김치, 자투리 야채, 산나물, 들나물, 봄나물, 취나물, 종합 푸성귀, 김치, 생채, 고추장, 투가리에서 끓는 된장, 때로는 양념간장 등 주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 식물성이 주종이 된다. 어머니는 때로 국수나 수제비에도 오이, 당근, 감자, 죽순 등 자연식품을 섞어서 비빔국수, 퓨전 수제비를 만들어내시곤 했다.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의 지혜를 조금씩 알아채긴 했지만 그렇다고 비빔밥이 보릿고개를 넘는 대책의 전부는 물론 아니었다.

어머니의 비빔밥은 섞고 비비는 선전용 한국적 요리미학도 아니었고,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이야기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고기볶음, 육회, 튀각, 고명, 참기름을 넣고 고급 맛을 내는 부잣집 식단은 더욱 아니었다.

밥이 부족하고, 반찬도 마땅치 않을 때, 그러면서 기죽지 말라고 생기를 북돋울 때, 어머님은 큰 양푼에다 비빔밥을 만들었고 식구들이 함께 먹거나 나눠주시곤 했다. 많은 식구가 한데 어울려 자연과의 조화와 융합을 이루는 지혜가 비빔밥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밥을 잘 비빈다. 술자리에서도 비비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도 잘 비빈다. 공깃밥 두 그릇을 어머니표 비빔밥에 대입해 비비면 다섯 명이 먹는다. 술자리에서는 비빔밥이 술안주로도 일급이다. 나는 입원환자일 때도 비빔밥을 선호했고 설날에도, 제사 후에도, 생일날에도 밥을 비비곤 했다. 그 비빔밥 속에서 나는 가족 건강 사랑 효도 조화 인내 배려 지혜 등 맛깔나는 말을 많이 찾을 수 있을까 멍청하게 기대하며 지금도 어머니 마음을 살핀다.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는 오늘의 나의 멘토로 삶을 안내하고 있지만 코로나 세상이 왜 그렇게 쓴 맛인지 우울증을 씻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어머니표 비빔밥을 주문하며 그 뜨거운 모정의 세월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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