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 먼저 누운 풀인가, 바로 선 정의인가 [최진석의 Law Street]

입력 2021-06-09 07:00   수정 2021-06-09 07:12


지난 7일 판결에 법조계가 들썩였습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소송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4부(부장판사 김양호)가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 닛산화학,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내린 결정입니다. 각하란 소송이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고 패소 판결과 동일한 결과로 간주됩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협정으로 인해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 판결이 3년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다른 강제징용 소송에서 내린 결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겁니다. 당시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하고 일본제철이 1인당 1억원씩 지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11 대 2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번 판결은 대법관 2명이 낸 소수의견을 따랐습니다. 재판부는 원고의 청구를 인용할 경우 이를 근거로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 대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사건의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빈협약 제27조와 국제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재판부는 덧붙였습니다.

법조계가 이번 판결에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최근 들어 한·일 관계에 민감한 판결이 연달아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5부는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여 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과 정반대 결론입니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면제(주권면제)’를 내세웠습니다. 국가면제란 ‘국제관습법상 다른 나라 정부를 피고석에 세우는 소송은 불가능하다’는 원칙입니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도 “‘공공복리’에 따라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법리를 적용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기존 판결과 정반대 결론을 내린 두 재판의 재판장은 같습니다.

기존 판례를 정면으로 뒤집는 판결, 특히 한일 관계에 민감한 사안에 대한 판결에서 이런 일이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기업 측의 배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이로 인해 아베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왔죠. 당연히 한일관계는 급랭했습니다. 대법원도 이에 합을 맞추듯 위안부 피해자분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1965년 한일청구권에 대한 법리적 해석도 이에 맞게 이뤄졌습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듯, 법원이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국제법 등을 외면하며 판결을 내리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죠. 이번 강제징용 판결에서 재판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올해 들어 한일관계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대립과 갈등에서 관계 개선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2001년, 일본 도쿄 전철역 선로에서 국경을 넘은 인간애를 실현한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의 희생은 언젠가 한일 양국의 협력의 정신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이 씨의 사례를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등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청와대 측에서도 “한일 관계를 해결하고 승화·발전시켜나가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죠.

때문에 법조계에선 최근의 판결들도 이런 정부의 분위기 변화를 살펴 내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풀이 이전과 반대 방향으로 바람보다 먼저 누운 것은 아니냐는 것이죠. 물론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한 판사는 “피해자분들에겐 안타깝지만 법리적으로 바람직한 판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정권 말기로 가면서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오고 있다는 평가죠. 물론 두 시각 모두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법원마다 다른 판결이 나오는 건 처음이 아니며, 개별 판사들의 판단을 존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번 판결이 다른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갯속인 것이죠. 같은 이유로 위안부 피해자분들과 관련된 소송들도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1심과 2심에서 어떤식으로 결론이 나든 대법원에서 기존 판례가 뒤집히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립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11대2라는 압도적인 우세로 결론이 난 사안을 대법원 스스로 3~4년만에 뒤집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죠. 만약 대법원의 입장에 변화가 없다면 향후 대법 판결이 났을 때 한일관계에도 상당한 파장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중앙지법에서는 강제징용 관련 소송이 19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분들과 지난 4월 위안부 피해자분들도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이들 소송과 관련된 사법부 안팎의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법원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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