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표 개인전, 정교한 초현실 그림에 담은 '현대인의 고뇌'

입력 2021-06-09 18:07   수정 2021-06-09 23:37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다.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 마천루들과 파스텔 색조의 하늘에서는 가벼운 흥분과 피로감이 뒤섞인 해질녘 도심의 공기가 연상된다. 그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표범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도시가 아니라 다른 곳을 바라보는 표범의 표정에서는 애수와 고독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김남표 작가(51)의 ‘Instant landscape(즉흥적 풍경)’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김 작가의 신작 12점을 포함한 즉흥적 풍경 연작 15점을 소개하는 개인전 ‘캐슬(castle)’이 열리고 있다. 작가가 휴지와 면봉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그린 초현실주의 그림들이다.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 재학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지만, 이름을 알리거나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도 마음 맞는 작가들과 미술적 실험을 하는 데 천착했다. 본격적으로 개인 활동을 시작한 건 2007년. 파스텔을 사용해 정교하면서도 몽환적으로 그려낸 기묘한 풍경들은 관객과 평단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러던 중 2010년 갑자기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제 작품의 이미지가 파스텔을 사용한 초현실주의 풍경화로 굳어지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평단과 미술시장이 제게 ‘비슷한 화풍의 신작을 계속 그려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그림을 그리는 게 지겨워지더라고요. 뭔가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지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다시 ‘그림 그리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 김 작가는 끊임없이 변신을 꾀했다. 유화물감을 비롯해 쇳조각, 인조털, 목탄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여러 오브제를 부착해보기도 했다. 2018년부터는 3년간 제주에 살며 숲을 그렸다. 이 그림을 50조각으로 나눠 판매하는 등 독창적인 판매 방식도 시도해봤다. 김 작가는 “재료와 기법, 이미지를 바꿀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제목인 ‘성’은 그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작품 세계를 의미한다. 지켜야 할 대상이자 몸이 쉴 수 있는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를 구속하는 양면성을 지닌 곳이다. “성을 지키면서도 수성에만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 작품 세계의 영토를 넓히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전시장에서는 도시의 풍경 속 표범과 올빼미 등 동물을 그린 그림들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휴지로, 때로는 나이프로 표현한 거친 질감에서는 맹수의 위엄과 도시의 웅장함 뒤 숨은 피로와 고독이 느껴진다. 붉은 코트를 입고 호랑이와 앵무새 같은 동물을 단 채 바다에 서 있는 여성을 그린 그림들도 인상적이다. 비애가 가득한 여성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위태롭다. 작가 자신이 느끼는 고독과 고뇌를 표현한 그림이지만,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미지들이다.

얼룩말이나 말이 등장하는 초현실 풍경화들에서는 동물의 발에 낀 이끼 등 화면에 배치된 모순적 이미지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가가 밑그림도 없이 얼룩말의 얼룩무늬 선 하나에서 시작해 즉흥적으로 구성해낸 그림으로, 작가의 탁월한 조형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이달 30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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