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남해 유배 중에도 임금 비판한 서포의 결기

입력 2021-06-11 18:12   수정 2021-06-12 00:13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선생(船生)’이다. 배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다.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 더미에 불을 붙여 순절했다. 어머니는 피란선을 타고 나오다 배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 유복자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다.

전란 중 선상에서 태어난 서포는 스승 없이 어머니 무릎에서 학문을 배웠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 옥당에서 빌린 책을 필사해가며 아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문과 급제 후 당대 지성의 최고봉인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하지만 정치의 격랑은 사나웠다. 장희빈 아들의 세자 책봉에 반대한 서포는 숙종의 미움을 사 평안도 선천으로 귀양 갔다. 풀려난 지 석 달 만에 경남 남해 노도로 다시 유배돼 가시 울타리 속에 갇혀 지냈다. 그러면서도 임금을 향한 충언과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충간의 하나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다. ‘사씨(謝氏)가 남쪽으로 쫓겨난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중국을 무대로 삼았지만, 실상은 장희빈에게 눈이 멀어 인현왕후를 내쫓은 숙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백성들의 환호 속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숙종도 읽다가 주인공의 처사에 분노해 책을 집어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서포가 남해에서 죽은 뒤, 소설의 결말처럼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인현왕후는 중전 자리로 돌아왔다.

그 시절 서포의 유배 길을 따라가는 여정은 육로만 천 리가 넘는다. 지금의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대신 옛날엔 배를 타고 남해로 가야 했다. 뭍의 끝에 서서 나룻배를 기다리던 서포의 심정은 어땠을까. 북쪽 변방에서 남쪽 섬으로 연이어 쫓겨난 유배객의 눈에는 윤삼월 흙길도 슬픔으로 젖고, 석양에 비친 일몰 또한 눈발처럼 차가웠을 것이다.

그 애절한 서포의 마음으로 노량 앞바다에 서서 오랫동안 섬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옷깃을 여미면서 그에게 바치는 시 ‘남해 가는 길-유배시첩(流配詩帖) 1’을 천천히 읊었다. 이 시는 서포의 몸을 빌려 그의 쓸쓸한 마음을 대신 노래한 연작시 중 한 편이다.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윤삼월 젖은 흙길을/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리/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전문은 그래픽 참조)

남해읍을 지나 벽련항에서 노도 가는 여객선을 탔다. 노도는 임진왜란 때 노(櫓)를 많이 만들었던 섬, 삿갓처럼 생겨서 삿갓섬이라고도 한다. 뱃길로 5분 거리인 이 섬에서 서포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최근 남해군은 150억원을 들여 섬 전체를 ‘문학의 섬’으로 조성했다.

노도 선착장에 내리자 ‘문학의 섬’을 상징하는 책 모양의 커다란 조형물이 답사객을 반긴다. 오르막길을 지나 한참 걸어가면 서포의 옛 집터와 초옥, 오래된 우물, 푸른 동백숲, 김만중문학관이 나온다. 반대편에는 작가창작실 3개 동이 있다. 모두 서포의 혼과 발자취가 어린 곳이다. 서포가 어머니의 부음을 늦게 듣고 절규하던 해안 바위, 솔잎 피죽과 해초로 연명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딘 흔적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섬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노자묵고 할배’라고 부른다. 일은 하지 않고 초옥에서 글만 쓰는 모습이 ‘놀고먹는’ 것으로 보였을 법도 하다. 문학관에는 그가 남긴 《사씨남정기》 《구운몽》 《서포만필》 등이 전시돼 있다. 언덕 위에 있는 문학공원의 ‘구운몽원’과 ‘사씨남정기원’에는 작품 속 인물상이 재현돼 있다. 그가 임시로 묻힌 ‘허묘’ 자리는 32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볼 수 있다.

모레는 서포가 세상을 떠난 기일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유배의 섬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유산과 정신은 아직도 형형하다. 정치인들에게는 통렬한 풍자와 비판의 거울이고, 문인들에게는 한글문학의 대선배이자 헌사의 대상이다. 그를 기리는 김만중문학상과 유배문학관에도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내년은 그의 서거 330주년, ‘남해 방문의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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