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의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2000여 리(里·800여㎞)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으며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 연호를 사용하는 등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사신을 파견했다. 한편 일본은 8세기 중반에 ‘신라정토론(新羅征討論)’을 내세워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선포했고, 공동의 적인 신라를 상대로 발해·일 동맹이 맺어졌다. 발해는 교류를 주도해 727년 이후 220여 년간 34회 사신단을 파견했고, 746년에는 민간인 1100명이 동해를 건너 혼슈 북부 해안에 상륙했다(윤명철,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2002년).
남으로는 대동강부터 원산까지, 서로는 요동반도까지, 북으로는 고구려도 관리하지 못했던 연해주 북부와 하바로프스크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광대한 제국이 됐다. 전에 우리 학자들은 일본 학계 주장을 수용해 요동을 뺀 채 압록강 하구에서 중만주 일대까지, 연해주 남부의 일부 지역까지가 발해 영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 중국, 특히 러시아 학자들의 발굴 덕분에 만주 일대가 대부분 발해 영토였다는 주장이 많아졌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그래서 고구려보다 영토가 1.5배나 넓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지방 및 종족 관리 방식의 차이, 자연환경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해인들이 강대국인 당나라를 물리치고, 빠른 기간에 대국을 이룩한 힘은 무엇일까? ‘세 명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三人渤海當一虎)’는 용맹함 때문일까? 문자가 있었고(《구당서》 발해말갈전), 외국인만 응시하는 당나라 과거(빈공과)에서 많은 합격자를 낸 수준 높은 교육열과 문화에 대한 열정 때문일까? 아니면 국가 시스템이 철저하게 완비되고, 군사력과 기술력이 크게 높아진 덕분일까?
발해는 2대 무왕이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며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남으로는 대동강부터 원산까지, 서로는 요동반도까지, 북으로는 고구려도 관리하지 못했던 연해주 북부와 하바롭스크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광대한 제국이 됐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