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홍 대양그룹 회장…'골판지 외길'로 50년 장수기업 일구다

입력 2021-06-15 18:07   수정 2021-06-16 00:40


1967년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 지물상(紙物商) 수백 개가 모인 이곳에 앳된 얼굴의 청년 기업인이 점포를 열었다. 20대 중반 나이로 서너 평 남짓한 골판지 가게를 운영하던 그를 두고 주변 상인들은 ‘학생 사장’으로 불렀다. 실제 그는 방산시장에서 멀지않은 성균관대에 다니던 학생이기도 했다. 연매출 1조원대에 이르는 대양그룹을 이끄는 권혁홍 회장의 55년 ‘골판지 인생’ 서막이 오르던 순간이다.
방산시장의 야무진 ‘학생 사장’
권 회장은 명륜동 캠퍼스에서 전차를 타고 골판지 가게를 오가는 고된 이중생활을 했다. 강의 시간이 빌 때면 시장으로 내달렸다. 수업을 들을 때도 머릿속은 장사에 대한 구상이 떠나질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가격을 흥정할 때만큼은 셈이 빠르고 야무진 그는 드센 시장통에서 곧 자리를 잡았다.

골판지 사업에 먼저 뛰어든 것은 10년 터울의 형 권혁용 선대 대양그룹 회장이다. 청량리에서 골판지 원단공장에서 일하다 공장을 차려 직접 운영에 나서면서다. 동생에게 을지로에 골판지 도소매 점포를 내라고 제안한 것도 형의 아이디어였다. 군대 전역 후 진로를 고민하는 동생에게 골판지 장사를 해보라며 자본금 10만원을 건넸다. “서민부터 재벌까지 누구나 사용하는 골판지 장사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형이 골판지를 만들면 동생이 내다 파는 ‘형제 경영’이었다. 유달리 우애가 깊었던 형제의 골판지 사업은 일생을 두고 이어졌다.

골판지 공장 사장과 학생 사장으로 사세를 조금씩 키우던 두 형제에게 1970년 큰 전환점이 다가왔다. 매물로 나와 있던 경기 안양의 대양제지 공장 인수를 결정하면서다. 골판지 공장 운영에 여념이 없던 형은 동생에게 제지 공장 운영을 맡겼다. 동생은 인수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공장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자금난에 빠지지 않도록 문턱이 닳도록 사채 시장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권 회장은 “돌이켜보면 나름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골판지 중간엔 구불구불한 모양의 ‘골심지’가 있다. 기업인의 숙명이 그렇듯 권 회장에게도 이런 굴곡진 순간이 닥치곤 했다. 공장을 인수한 지 5년 만에 찾아온 위기가 그랬다. 1975년 여름 집중 호우로 안양천이 범람하면서 공장에 있던 ‘초지기(종이를 만드는 기계)’와 재고 물량이 모두 물에 잠겼다. 피해 규모만 9000만원에 달했다. 공무원 월급이 4만원일 때였다. 대양제지가 수해로 망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권 회장이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극적인 기사회생의 반전이 이어졌다. 청와대 직원들이 권 회장을 찾아와 “피해액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떠난 다음날 거래은행에서 사업 자금을 빌려줄 테니 서류를 만들어오라고 연락했다. 당시 산업화에 주력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수해 피해 기업을 도우라고 지시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계기로 권 회장의 인생관도 달라졌다. 권 회장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장사에 뛰어들었으나 이제는 ‘산업보국’을 하는 기업가로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말했다.
형제 경영으로 50년 장수 기업 일궈
권 회장은 1982년 대양제지에 이어 또 다른 원지 회사 신대양제지를 설립했다. 공장 조성에만 2년이 걸릴 만큼 당시로서는 규모 있는 투자였다. 대양제지는 형이 다시 경영을 맡았다. 1984년 첫 매출 5000만원을 낸 신대양제지는 약 10년 만에 매출을 500억원으로 끌어올렸다. 사업 초기 한 대였던 초지기는 세 대로 늘었다. 이후 지금까지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안정적인 회사 성장 비결에 대해 권 회장은 우애 깊은 ‘형제 경영’을 꼽는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권 회장은 어릴 적부터 형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유교 전통을 중시하는 안동 권씨 특유의 가풍도 한몫했다.

회사 직원들은 젊은 시절 제조 현장을 한창 누비던 권 회장에게 ‘빨리빨리 사장’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남들은 10분 동안 들여다볼 일을 10초 만에 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빠른 판단력을 빗댄 말이다. 수학을 전공한 권 회장은 스스로도 수리에 밝은 편이라고 자평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수학 성적만큼은 항상 상위권이었다는 그는 “사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수학을 잘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가 장착한 또 다른 무기는 한눈 팔지 않는 성실함이다. 권 회장은 학생 사장 시절부터 워커홀릭이었다. 해가 뜨기 전 집을 나서 장사를 시작해 해가 다 지고 나서야 길에 내놓은 골판지를 점포 뒤편 창고로 옮겼다. 그는 “일감만 있으면 하루 열다섯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일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8시간 일하는 것과 16시간 일하는 것은 능률이 몇 배는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직원 보듬는 스킨십 경영
지난해 팔순을 넘긴 권 회장의 일과는 소박하다. 지금도 사옥의 구내식당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먹지 않을 반찬은 수저를 대기 전 식당 직원에게 도로 물린다.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사업하던 습관이 지금도 몸에 배었다”는 것이다.

권 회장은 50년 이상 회사를 운영하며 종업원에게 단 한 번도 비속어를 쓴 적이 없다. 회사 직원을 ‘나를 대신해 일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우했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젊었을 땐 현장에서 만난 직원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불러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경쟁 업체보다 월급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려고 노력한 것도 직원을 아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10월 화재사고가 발생한 대양제지 안산 공장은 ‘아픈 손가락’이다. 공장 가동이 멈춰 수십 명의 직원이 어쩔 수 없이 일손을 놓고 있어서다. 대양제지보다 피해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수년 전 신대양제지도 화재가 난 적이 있다. 권 회장은 일부 설비를 최신형 장비로 교체하는 투자를 단행했다. 현재 신대양제지 공장은 생산성이 전보다 더 높아져 실적 견인에 기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권 회장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잘 극복하는 것이 경영자의 진짜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권 회장의 집무실에는 100인치 크기의 대형 모니터가 설치돼 있다. 전국 12개 골판지 관련 제조공장을 원격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이다. 반세기가 지난 골판지 업계의 최장수 기업이지만 늘 새로 거듭나는 첨단 기업을 지향하는 권 회장의 의지가 엿보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도 전자결재 시스템을 통해 모든 회사 업무를 직접 챙긴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회사 경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골판지 간판기업 대양그룹
골판지업계 첫 수직계열화 완성…선도적 경영모델 제시
골판지 원료의 약 90%는 재활용한 고지(古紙)를 쓴다. 원지 제조회사에서 고지를 물에 풀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압축 건조하는 공정으로 골판지 원지를 생산한다. 이 원지를 골판지 원단 회사가 가져와 골판지 겉면과 골심지 등으로 가공한다. 이 원단을 붙이고 용도에 맞게 절삭하는 과정까지 끝내야 골판지 박스가 된다.

골판지산업은 부피에 비해 단가가 비교적 낮은 원료 특성상 원료 및 완제품 시장 모두 내수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원지-원단-박스 세 단계에서 안정적인 공급망을 갖추는 게 골판지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양그룹은 신대양제지 대양제지공업 신대양제지반월 대영포장 광신판지 신대한판지 대양판지 등 7개 회사로 구성된 골판지 기업집단이다. 대양제지와 신대양제지 신대양제지반월은 원지를 제조한다. 나머지 회사는 이 원지를 가공해 골판지 원단과 박스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 골판지 공급량의 약 23%를 대양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대양그룹은 국내 골판지 업계에선 최초로 수직계열화에 성공한 기업이다. 수직계열화 작업은 권혁홍 대양그룹 회장이 1982년 신대양제지를 설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권 회장과 형인 권혁용 선대 대양그룹 회장은 골판지 제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원가 절감과 시장 지배력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두 형제는 1998년 광신판지를 시작으로 신대한판지, 대양판지 등 골판지상자 제조기업을 인수 또는 설립하며 그룹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1996년 신대양제지와 대양제지의 경영 체계를 일원화한 일은 국내 골판지산업에 선도적인 경영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제지업계 관계자는 “일본 등 제조 선진국에선 이미 1960~1970년대부터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제지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국내에서 대양그룹의 등장은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 산업도 그만큼 고도화를 이룩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2016년 형인 권 선대 회장이 별세하면서 권 회장은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다. 그룹 지배구조를 자신이 최대 주주로 있는 신대양제지 위주로 재편하면서 소유와 경영을 일체화하는 데 공을 들였다. 수직계열화를 이룬 자회사 간 시너지를 강화하기 위한 1인 경영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대양그룹의 지배구조 전환을 통해 필수재에 가까운 골판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산업 토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 권혁홍 회장은

△1941년 서울 출생
△1961년 휘문고 졸업
△1967년 성균관대 수학과 졸업
△1972년 대양제지 대표이사
△1982년 신대양제지 대표이사
△2007년~현재 한국제지공업협동조합 이사장
△2011년 금탑산업훈장
△2016년 대양그룹 회장
△2019년 중소기업중앙회 수석부회장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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