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간 대한민국 양궁 키워낸 키다리 아저씨의 '1등 DNA'

입력 2021-08-02 06:02   수정 2021-08-02 06:32


"양궁을 본받아라."

체육계에서 승부조작, 폭력, 횡령 등 비리 사건이 터지거나 예상 외로 성적이 안 좋을 때면 항상 나오는 말이다. 한국 양궁은 다른 어떤 예외를 두지 않고 공정한 평가를 거쳐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림픽 메달보다 국가대표 선발전이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덕분에 한국 양궁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세계 최강 자리를 지켜냈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뒤에는 1등 DNA를 심은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현대차그룹은 1985년부터 무려 37년째 한국 양궁을 후원하고 있다. 대한양궁협회장도 1985년 취임한 정몽구 명예회장부터 올해 재선임된 정의선 회장까지 현대차그룹에서 맡아왔다. 지금의 한국 양궁 위상은 긴 시간 선수들을 아낌없이 후원해온 현대차그룹 공이 크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다른 운동은 각 기업이 선수 개개인을 후원한다. 특정 기업 후원을 받는 코치, 선수 등이 하나의 '라인'으로 묶이면서 국가대표 선발 등에 '자기 선수'를 세우려는 알력이 발생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궁은 현대차가 단독 후원사라 '라인'이 없다. 모든 선수를 똑같이 대하고 그런 만큼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37년 단독 후원사가 요구한 한 가지 원칙
공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한 실력 우선주의는 키다리 아저씨 현대차가 한국 양궁에 심은 핵심 DNA다. 현대차는 양궁협회를 37년간 후원하며 선수단 선발이나 협회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협회가 지켜야 할 하나의 원칙은 주문했다. "협회 운영은 투명해야 하며, 선수 선발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력 우선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은 똑같이 경쟁해 실력을 인정 받으면 나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대표선수로 발탁된다. 이번 양궁 남자 대표팀에서 막내 김제덕(17)부터 김우진(29), 맏형 오진혁(40)까지 10대와 20대, 40대 선수가 팀을 이룬 것도 이 원칙 덕분이다.

1988 서울올림픽과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던 김수녕 선수가 1999년 선수로 복귀, 실력으로 대표 자격을 거머쥐고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일도 있다.

이러한 실력 우선주의는 현대차그룹 내에도 함께 심었다. 연공서열과 순혈주의를 타파하며 젊은 인재를 발탁하면서다. 기존의 직급과 호칭 체계를 축소 통합하고 승진연차 제도도 폐지됐다. 능력만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팀장과 임원이 될 수 있도록 바꿨다.

연구개발(R&D) 역량이 뛰어난 전문가들은 은퇴하지 않고 자기 분야에서 자유롭게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연구위원'으로 위촉하기도 한다. 임원과 동등한 직급으로 대우하며 연구실과 예산 우선 지원,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도 제공한다.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발전의 원동력
한국 양궁은 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고 1988 서울올림픽 첫 여자 단체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9연패를 이어가며 세계 최강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개발과 훈련법을 도입하며 혁신을 멈추지 않은 덕분이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토너먼트 형태의 새로운 경기 방식이 도입되자 양궁협회는 선수들이 흔들림없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물놀이, 야구장 등에서의 소음 극복 훈련을 시작했다. 2010년 세트제 시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이빙, 번지점프 훈련도 했다.

2016 리우올림픽과 이번 도쿄올림픽을 앞두고는 현대차그룹 지원을 받아 활 비파괴 검사, 고정밀 슈팅머신, 비전 기반 심박수 측정 장비,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 선수 맞춤형 그립 등 첨단 기술을 통해 장비의 품질과 성능에 더욱 완벽을 기하는가 하면 선수들의 멘탈 강화 훈련도 했다.

이와 관련, 대한양궁협회장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새로 적용한) 여러 기술이 많았는데 화살 골라내는 기술이 참 중요했다"며 "화살의 편차가 없이 좋은 화살을 골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기술이 유용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최근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사업 영역에서도 '자동차 제조 기업'에서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경쟁력 갖춘 자동차를 계속 선보이는 한편 수소전기차, 도심 항공 모빌리티, 로봇 등 첨단 영역에 도전해 주목할 만한 성과도 낸다.

특히 수소 분야에서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최근에 로봇 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하며 로봇 사업을 본격화한 데다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개발에도 속도를 내는 중이다.

기초체력 위한 투자는 아깝지 않다
미래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도 현대차그룹이 한국 양궁에 심은 DNA라 할 수 있다.

양궁협회는 유소년부터 국가대표에 이르는 우수선수 육성에 큰 공을 들이고 있다. 특별지원으로 일선 초등학교 양궁장비와 중학교 장비 일부를 무상 지원하고, 초등부에 해당하는 유소년 대표 선수단도 2013년 신설했다. '유소년대표(초)-청소년대표(중)-후보선수(고)-대표상비군-국가대표'에 이르는 체계적 육성 시스템이 갖춰진 것.

코치 양성에도 힘 쏟고 있다. 양궁협회는 지도자 연수 과정을 마련해 일선 코치들에게 선수의 성장단계별 필수 훈련 요소들을 교육한다. 초중고와 실업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수들에게 일관성 있는 지도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제대회 적응을 위해 국가대표, 상비군, 지도자, 심판 대상으로 무료 영어교육도 실시한다.

현대차그룹 역시 다방면으로 미래 인재 육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학협력기업 현대엔지비를 통해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체계적 교육과정을 지원한다. 국내외 대학 및 연구기관과 기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연구장학생 제도도 마련해 학·석·박사과정 중인 우수 인재를 조기 발굴해 지원하고 있다. 연구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서울대에 '차세대 자동차 연구센터', 한양대에 '정몽구 미래 자동차 연구센터'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부품회사들만을 위한 공익재단인 '자동차 부품산업진흥재단'을 설립했고, 부품사 엔지니어가 남양연구소에서 설계에 공동 참여하도록 하는 '게스트엔지니어 제도'를 통해 부품사 개발력 향상도 지원하고 있다.

현대차, 기아가 해외시장 진출시 국내 부품사가 동반 진출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중소 부품사 경영 안정을 위한 대규모 자금 지원 프로그램도 상시 운영한다. 코로나19로 부품사들이 어려움을 겪은 지난해에는 1조원 구모 자금을 수혈하기도 했다.

한국 양궁이 2020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휩쓴 데 대해 정의선 회장은 "선수들이 너무 잘해줬고 감독님들 모두 잘 해주셨다. 국가대표팀이 진천에서 계속 같이 연습 시합을 해줘서 올림픽 대표팀이 더 잘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궁인들 모두가 같이 이뤄낸 거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관계자들에게 공을 돌린 뒤 "올림픽이 끝난 뒤 다른 체육단체들과 함께 포상 방침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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