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새로운 조건, 리페어 [김용섭의 트렌드 빅 퀘스천]

입력 2021-08-24 17:42   수정 2021-09-30 11:45


혹시 당신은 ‘고급스러운, 호화로운, 사치스러운, 명품’ 등의 의미로 쓰이는 럭셔리(luxury)와 ‘수리, 보수, 수선’의 의미로 쓰는 리페어(repair)가 잘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는가? 비싼 명품백을 수선해서 쓰기도 하지만 돈이 충분히 많다면 그냥 새걸 사서 쓰는 게 더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리페어가 선택 가능한 옵션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럭셔리의 조건으로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좀 달라졌다. 더 이상 낡았다고, 고장났다고 버리기보다 리페어가 가능하다면 되살려서 쓰는 것이 멋지다고 여긴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리페어가 절약의 이미지가 아니라 친환경 이미지이자 소비자의 세련된 소비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 변화에 럭셔리 브랜드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에르메스와 셀프리지는 왜 리페어를 주목할까
에르메스의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럭셔리는 수리할 수 있는 것이다(Luxury is that which you can repair)”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명품 리페어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1960~1970년대에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을 인용한 것이다. 오래전 할아버지의 말을 언급한 건 우연이 아니다. 에르메스가 리페어를 바라보는 시각이자 태도를 얘기하고, 지금 시대에 리페어가 럭셔리의 중요 가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에르메스 창업자의 6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1978년부터 2006년까지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CEO)이자 회장을 맡았던 장루이 뒤마다. 버킨백, 켈리백을 선보여 에르메스를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키웠으며 수요가 아무리 많아도 품질 관리와 희소성을 위해 공급량을 늘리지 않는 전략을 세우고 대기 리스트를 만들었다.

앞서 ‘럭셔리는 수리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던 할아버지는 로베르 뒤마다. 경영자가 에르메스 가문에서 뒤마 가문으로 바뀐 시점이 이때인데, 창업자의 3대인 에밀 에르메스의 사위가 로베르 뒤마다. 지금 에르메스 회장인 악셀 뒤마는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의 사촌동생이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회장이었지만 그는 경영 대신 크리에이티브를 선택했고, 에르메스의 가치인 예술과 장인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는 할아버지의 리페어에 관한 화두를 중요한 가치로 대외에 강조함으로써 럭셔리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에서 ‘오래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에르메스는 가죽제품을 제작할 때 180여 년 전 장인들의 방식 그대로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물론 에르메스는 대기 리스트가 수년치 쌓여 있고,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 리페어와 오래 쓰는 것을 강조해도 제품 판매에 전혀 지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낡고, 오래된, 헌것의 가치가 확실히 바뀐 시대다. 이건 빈티지나 앤티크 같은 접근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다. 결국 모든 럭셔리는 새것을 덜 사고, 가진 것을 오래 잘 관리하고 고쳐서 쓰는 것이 멋지다는 메시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영국 최고 백화점으로 손꼽히는 셀프리지는 럭셔리 백화점의 대표 격이다. 셀프리지는 2020년 ‘프로젝트 어스(Project Earth)’라는, 지속가능을 위한 5년짜리 장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여기엔 렌털과 리페어, 리유즈(reuse·재사용)가 중요하게 포함돼 있다. 비싼 물건 위주로 파는 럭셔리 백화점이 수선과 재사용, 대여 서비스를 강화한 것이다. 특히 수선을 접수하는 리페어 컨시어지 부스는 아주 세련되고 멋지게, 그리고 크게 꾸며졌다. 국내 백화점이나 아울렛에서 수선하는 곳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기본적인 사후서비스(AS)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선을 다룬다. 소비자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리셀(resell·되팔기)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리셀과 셀프리지를 합쳐서 리셀프리지(Resellfridges)라는 말을 만들었을 정도로 리셀 사업에도 진심이다. 아울러 2025년까지 셀프리지엔 환경과 윤리적으로 인증된 소재를 사용한 것만 입점시키겠다는 선언도 했다. 확실히 럭셔리의 방향에서 지속가능과 친환경은 대세다.
럭셔리의 리페어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샤넬, 디올, 구찌 등을 비롯해 잘나가는 패션 럭셔리 브랜드는 대부분 화장품을 판매한다. 브랜드의 가치를 패션에서 뷰티로 확장하며 돈을 더 버는 셈인데, 에르메스는 이런 흐름에 가장 뒤늦게 동참했다. 2020년 3월 67달러(국내 판매가는 8만8000원)짜리 립스틱을 출시하며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좀 더 비싸져 9만원대다. 샤넬과 구찌의 립스틱이 4만원대인 걸 감안하면 확실히 비싸다. 여기서 포인트는 비싸다는 게 아니다. 리필 제품을 판다는 사실이다. 리필이 가능한 케이스를 썼고, 완제품의 반값 정도로 리필 제품을 판다.

샴푸나 세제 등 수많은 일상 제품은 그동안 리필용이 있었지만, 명품 립스틱의 리필 제품은 새로운 접근이다. 에르메스는 럭셔리의 새로운 가치를 전면 폐기에서 리페어로의 전환으로 본 것이다. 에르메스는 립스틱에 이어 블러시 제품도 리필용을 판다. 아무리 멋진 케이스라도 립스틱과 블러시를 다 쓰고 나면 버려진다. 그런데 리필용으로 쓰면 케이스는 그대로 활용된다. 적어도 케이스를 다시 만드는 만큼의 자원과 에너지 낭비, 탄소 배출은 줄일 수 있다. 명품과 리필, 럭셔리와 리페어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면 이젠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상품의 계획적 노후화’라는 말이 있다. 계속 새로운 것을 팔려면 한번 산 물건을 영원히 쓸 수 있게 해선 안 된다. 수명의 한계가 존재해야 한다. 생산자와 판매자는 수선과 수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분명 수선이 되긴 하는데 몇 달씩 걸린다거나, 고치는 비용이 꽤 비싸다거나 해서 그럴 바엔 그냥 새걸 사겠다고 마음먹게 하기도 한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리페어, 리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 소비자의 돈을 아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원 낭비 방지와 친환경의 관점으로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다. 소비자도 돈을 아끼는 마음으로 리페어, 리필에 동참하는 게 아니라 환경의 가치를 소비에 반영하는 것이다. 분명한 건 소위 명품 브랜드들의 리페어와 리필을 앞으로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케팅에서 중요 트렌드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도 눈치챘고, 본격적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가장 앞장서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들이 아껴 쓰고, 고쳐 쓰는 것을 멋지고 세련된 욕망이라고 강조하면 이 메시지는 다른 분야로 퍼질 가능성이 크다.
Better than new: 새것을 갖는 게 정말 최선인가?
당신은 새것이 좋은가, 아니면 헌것이 좋은가? 가방, 옷, 가구 등 일상에서 쓰는 물건 얘기다. 무조건 새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오래되고 낡긴 했어도 빈티지, 앤티크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엔 이를 무조건 ‘취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새것과 헌것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컨시어스(conscious) 소비, 즉 ‘의식 차이’라고 보는 시각도 커졌다. 이를 패션계에선 컨시어스 패션(conscious fashion), 서스테이너블 패션(sustainable fashion)이라고 한다.

혹시 당신은 신상품만 나오면 갖고 싶어하거나, 물건을 사놓고 나서 조금만 지나면 금세 관심을 잃어버려 방치하진 않는가? 새것을 사서 오래 쓰고, 설령 고장나거나 수선이 필요하면 고쳐서 쓰고, 심지어 자식에게 물려줘서 계속 쓰면 더 좋다. 새것을 사서 쓰다가 중고로 되팔고, 그걸 산 사람이 쓰다가 또 중고로 팔고, 이렇게 물건의 가치가 계속 유지되는 것도 좋다. 물건이 필요해서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것을 계속 활용하는 차원이니까 생산(제조)를 위한 탄소 배출과 자원 낭비를 막는다.

소비자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파타고니아다. 낡은 옷이란 의미의 ‘원웨어(Worn Wear)’는 파타고니아의 수선 캠페인이다. 원웨어 캠페인의 슬로건이 ‘Better than new(새것보다 낫다)’인데, 타사 브랜드 제품도 수선해주고 매장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수선해주기도 한다. 파타고니아는 2025년까지 모든 제품에 재활용 소재와 재생가능한 소재를 쓰겠다는 목표를 진행 중이다. 리페어는 파타고니아식 환경 운동인 셈이다.

이미 존재하는 물건의 가치를 계속 유지하며 사용하는 것과 무조건 새것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매년 엄청나게 많은 물건이 새로 생산된다. 그것이 매년 쌓인다고 생각해보라. 새로운 소비를 위해 기존에 있던 물건들은 방치되다가 결국 폐기된다.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과 자원 소비도 문제지만, 폐기하면서 낭비되는 자원도 문제다.

패션산업에서 재활용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근 들어 재사용,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를 쓰는 패션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폐기돼 쓰레기 매립지로 가는 게 대부분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과잉 생산이다. 이는 바꿔 얘기하면 우리가 쉽게 사서, 잠깐 입고, 금세 버린다는 의미기도 하다. 최신 유행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자 새것에 대한 강박증은 패션업계가 유도한 것이다. 그래야 계속 팔리니까. 새것을 계속 사면 옷장은 금세 넘쳐난다. 잠깐 입고 버리는 옷도 나오고, 너무 많아서 방치해뒀다가 아예 입지도 않고 유행 지났다고 버리는 옷도 나온다.
당신의 옷장이 잘못한 걸까? 패션산업이 잘못한 걸까?
세계 패션산업이 매년 1000억 개의 옷을 생산해내는데, 버려지는 것도 매년 330억 개 정도다. 지구 인구 78억 명으로 계산해보면 한 명에게 새 옷이 13개 정도, 버려지는 건 4개 정도 돌아가는 셈이다. 물론 생산되는 1000억 개가 다 팔리는 게 아니다. 재고로 있다가 폐기되는 것도 많다. 과잉 생산이다. 여기서 버려지는 옷은 최종적으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로 간다. 서아프리카의 최대 중고시장은 가나 칸타만토에 있다. 칸타만토 시장의 주거래 품목이 헌 옷인데, 매주 1500만 개의 옷이 수입된다고 한다. 연간으로 계산하면 80억 개 가까이 된다. 가나 인구가 3000만 명 정도인데 너무 많다. 이 정도면 가나의 소들까지 옷을 걸쳐도 남을 정도다. 실제로 40%가량은 활용되지 않고 폐기된다고 한다.

혹시 정상적인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강이나 바다, 초원에 그냥 버리거나 아무 데서나 태우는 일이 많다. 소가 풀 대신 방치돼 버려진 옷을 씹어 먹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어부들이 던진 그물에는 고기가 아니라 쓰레기가 된 헌 옷 뭉치가 걸려들거나 해변에 시커먼 해조류같이 밀려들어 어업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설마 그럴까 싶겠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미세 플라스틱 문제와 수질 오염, 탄소 배출, 대기 오염이 심각할 수밖에 없고 헌 옷을 먹은 소와 미세 플라스틱에 오염된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에게도 환경적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헌 옷도 아프리카나 제3세계로 간다. 당신이 헌 옷 수거함에 넣은 바로 그 옷이 가나의 어느 강가에서 태워지는 셈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를 점령하는 뉴스에서 익숙한 개구리 전투복을 입은 탈레반 군인들을 봤을 텐데, 그것도 이런 경로도 갔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헌 옷 중 국내에서 재활용되거나 유통되는 건 5% 정도고, 95%는 수출된다. 헌 옷 수출에서 한국은 미국, 영국, 독일, 중국에 이어 세계 5위다. 수출액은 3억1200만달러(2019년 기준)로 결코 적지 않다. 헌 옷 수거함에 넣은 옷이 자선단체로 보내져서 어려운 이들에게 전달되거나 재활용될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헌 옷 수거함은 지방자치단체도 자선단체도 아닌, 중고 의류 수출을 하는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것인데 국내에만 100개 넘게 있다고 한다.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생각해볼 일이기도 하다. 재활용, 업사이클도 좋지만 애초에 과잉 생산되지 않고, 쉽게 버려지지 않아서 재활용될 여지가 줄어드는 게 더 좋다.

덜 버리려면 덜 사야 하고, 이는 가진 것을 더 오래 입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선 더 좋은 품질의 옷이어야 한다. 좋은 소재의 옷을 길게 입는 것이 트렌드 화두가 된 지는 꽤 됐지만, 이제 럭셔리가 그 화두를 적극 이어간다. ‘럭셔리는 수리할 수 있는 것’이란 메시지가 아주 비싼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전유물만은 아닐 것이다. 패스트패션을 비롯한 중저가 브랜드도 지향할 일이고, 리페어가 새로운 욕망과 트렌드가 되는 건 우리가 응원할 일이기도 하다.

■ 김용섭은

트렌드 인사이트&비즈니스 크리에이티비티(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자 트렌드 분석가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대기업과 정부 기관에서 2500회 넘는 강연과 비즈니스 워크숍을 했고, 200여 건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저서로 《결국 Z세대가 세상을 지배한다》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코로나 사피엔스, 새로운 도약》(공저) 《라이프 트렌드 2021: Fight or Flight》 《언컨택트》 《펭수의 시대》 《라이프 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요즘 애들, 요즘 어른들: 대한민국 세대분석 보고서》 《라이프 트렌드 2019 : 젠더뉴트럴》 등 4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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