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퓨터 글로벌 패권 경쟁 '빅뱅'

입력 2021-08-26 05:19   수정 2021-08-26 06:47

초강력 슈퍼컴퓨터를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융합 등이 중심이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슈퍼컴퓨터는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데요. 연산 처리 속도가 1초에 수십 경(京) 번에 달할 정도로 빠르고, 계산 오차 범위가 사실상 ‘제로(0)’에 가까운 슈퍼컴퓨터는 AI 성능 향상의 핵심 인프라로 꼽힙니다. 또한 신제품 및 신약 개발, 자율주행, 안보 등 활용 범위도 무궁무진합니다. 정보기술(IT) 업체 간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 간 패권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슈퍼컴퓨터의 개발 현황을 짚어봅니다.

현재 슈퍼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는 세계 1위 슈퍼컴퓨터 ‘후카쿠’를 보유한 일본입니다. 일본 국립 이화학연구소와 후지쓰 리미티드가 공동 개발한 후카쿠는 국제슈퍼컴퓨터학회가 발표한 세계 컴퍼컴퓨터 순위에서 지난해 6월과 11월에 이어 올해 6월까지 3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후카쿠는 6월 순위에서 단순 계산속도를 겨루는 ‘TOP500’, 산업이용에서 사용하는 계산처리 속도를 측정하는 ‘HPCG’, AI 분야의 계산성능을 보는 ‘HPL-AI’, 빅데이터 해석 능력의 지표가 되는 ‘그래프(Graph)500’ 등의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습니다.

후카쿠가 얼마나 뛰어난지 볼까요. 후카쿠는 432개의 랙에 ARM기반 48코어 A64FX 프로세서 15만8976개가 병렬로 연결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연산 처리 속도는 최대 415.5 페타플롭스(1초 안에 할 수 있는 연산처리가 1000조 번에 달하는 것)에 달합니다. 처리 속도가 1초에 41경 번에 달한다는 얘기인데, 이는 수년간 1위 자지를 차지했던 미국 IBM의 서밋(Summit)보다 2.8배나 빠른 속도입니다. 후카쿠는 현재 일본 보건당국의 코로나19 대응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데, 추후 기후변화, 신약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미 일본 정보과학기술연구기구(RISR)는 지난 4월부터 후카쿠를 활용해 진행할 74개 연구 프로젝트를 선별하고, 관련 연구에 착수한 상태입니다.

후카쿠는 성능 자체도 뛰어나지만, 일본 당국과 후지쓰가 7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됩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슈퍼컴퓨터를 정비하려면 적어도 수십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금액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투자 비용이 워낙 막대한 탓에 그간 슈퍼컴퓨터는 민간 기업이 아닌 국가 주도로 개발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로 산·학·연을 위해 탄생한 국가 슈퍼컴퓨터는 사업적 목적보다는 기상 예측 및 지진·해일 대책 시뮬레이션 등 대부분 공익적 목적에 한정돼 사용돼 왔습니다.

슈퍼컴퓨터의 개발·활용 주체가 바뀌게 된 시점은 AI의 등장입니다. 기업들이 딥러닝과 머신러닝 등의 기술로 고도화된 AI를 개발하자, 방대한 데이터를 정교하게 처리할 고성능 슈퍼컴퓨터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매년 한정된 예산을 바탕으로 개발한 국가 슈퍼컴퓨터로는 이러한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을 2014년부터 예견한 일본은 후지쯔와 함께 후카쿠 개발에 착수해 결국 1위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후지쯔의 후카쿠 개발을 지원한 이화학연구소의 마츠오카 사토시 센터장은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기업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슈퍼컴퓨터를 활용하고 거기에 국가가 지원하는 형태로 협력하지 않으면 슈퍼컴퓨터의 발전은 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슈퍼컴퓨터의 개발은 기업이 주도하고,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슈퍼컴퓨터 개발 방향이라는 얘기로 풀이됩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 역시 슈퍼컴퓨터에 매년 조 단위 예산을 투입하며 일본을 매섭게 추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정부의 선두 탈환 의지가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올해 한 해에만 18억달러(약 2조원)를 쏟아부어 오는 2023년까지 엑사플롭스급(1초 안에 할 수 있는 연산 처리가 100경 번 수준) 슈퍼컴퓨터 3대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중국과 EU도 비슷한 시기에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내놓겠다는 목표를 천명했습니다.

글로벌 IT업체들도 슈퍼컴퓨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역시 미국 기업들이 돋보이는데요. 기존 IBM 등은 물론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까지 AI 계산 특화 슈퍼컴퓨터를 자체 개발하고 있습니다. 구글은 지난 5월 ‘TPU v4 포드(Pod)’라 불리는 슈퍼컴퓨터를 발표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AI 슈퍼컴퓨터 중 성능이 상위 5위 안에 들어갈 수준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구글은 이미 사내에서 TPU v4 포드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슈퍼컴퓨터엔 자체 개발한 AI 계산 전용 칩셋 TPU이 4100개가 탑재됐는데요, 기존 구글의 슈퍼컴퓨터보다 계산 속도가 약 10배 빠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MS의 애저 기반 슈퍼컴퓨터는 오픈 AI를 통해 개발 및 운영됩니다. 엔비디아의 최신 GPU(그래픽 처리 장치)가 약 1300여 개가 탑재돼 계산 속도가 일반 CPU(중앙처리장치)만을 이용할 때보다 250배 빠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국내 기업 중에서는 네이버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네이버는 지난해 10월 AI 연구에 활용할 700페타플롭스급 슈퍼컴퓨터를 국내 기업 가운데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140개의 컴퓨팅 서버를 갖췄으며, 내장한 GPU만 1120개에 달합니다. 정부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5월 국내 5호 슈퍼컴퓨터 '누리온' 5호기 성능보다 뛰어난 6호, 7호 슈퍼컴퓨터를 새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이로써 2030년까지 엑사급 성능으로 세계 5위권 성능 슈퍼컴퓨터 보유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다만 아직 국내 슈퍼컴퓨터 개발 속도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슈퍼컴퓨팅 콘퍼런스’가 발표한 세계 슈퍼컴 순위 ‘톱500’에서 누리온 5호기는 21위에 올라 2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습니다. 국내 슈퍼컴퓨팅 관련 정부 투자액도 연 1000억원 내외로 주요국의 10분의 1에서 20분의 1에 불과합니다. 기업으로 봐도 네이버 외에는 슈퍼컴퓨터 부문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업체를 찾기 힘듭니다. 슈퍼컴퓨터 패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만큼 한국도 기업과 정부가 좀 더 긴밀한 협력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배성수 IT과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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