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만의 공간' 하나쯤 있었으면…

입력 2021-08-26 17:34   수정 2021-08-27 00:02

어린 시절 부엌 천장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으로 가는 턱을 올라 문을 열면 곰팡이 가득한 곳으로 가는 구조였다. 턱을 기어 올라갈 나이가 됐을 때 다락방은 귀신의 방이었다. 밤이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초등학생이 됐을 때 귀신이 없다는 걸 깨닫고 다락방은 놀이터가 됐고 나만의 공간이 됐다. 낡은 일기장과 장난감, 사진첩, 라디오 같은 집안의 역사가 깃든 탐험공간이기도 했다. 다락방에서 친구와 노는 것도 재밌고, 할머니가 나를 찾는 것도 즐거웠다. 숙제하거나 책을 볼 때, 혼나고 난 다음에도 다락방은 특별한 공간이었다.

학창 시절 나만의 공간은 성당이었다. 선후배, 신부님, 어르신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다. 어설픈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며 이유 없는 눈물을 함께 흘린 사춘기 친구들과 짝사랑의 추억이 있었다.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창조론은 맞는지 밤새 토론했던 곳.

대학 시절에는 술집과 다방이 나만의 공간이었다. 찌개 하나에 술잔을 돌리다 노래를 부르며 웃던 곳, 주인아저씨가 내 얼굴만 보고 외상 해주던 곳. 커피 맛도 모르고 음악도 몰랐지만 클래식 LP를 틀어주던 골목길의 음악다방이 비타민 같은 장소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공간을 잊은 채 살았다. 단골집은 있었지만 어렸을 적 느낌은 아니었다. 청춘 시절 일에만 매달렸던 시간을 지나 다시 한번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

J K 롤링이 해리포터를 썼다는 에든버러의 카페는 이야기보따리를 개봉해 준 훌륭한 장소였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플로리안 카페는 카사노바부터 괴테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 많은 명사가 사랑과 철학을 말하며 사색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쿠바는 그 자체가 특별한 곳이었을 것이다. 미국을 떠나 만난 자유와 에너지는 많은 영감을 줬고 그가 마시던 모히토는 역사가 됐다.

나만의 공간은 추억과 만남이 있는 곳이면 좋겠다. 홀로 있고 싶을 때 있어도 괜찮은 곳, 마음껏 울어도 되는 곳, 생각에 잠겨도 좋고 책을 봐도 좋은 곳, 가족과 함께 대화 나누기 좋은 곳이 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여행지에 늘 가던 숙소가 있고, 항상 들르는 식당이 있으면 좋겠다. 늘 가는 바닷가 한쪽 바위 위나 등산로 중턱에 내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10년 전 앉았던 자리에서 과거의 나와 담소 나누고 싶다. 힘들 때면 한잔할 수 있는 술집, 주인과 격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식당, 나만의 블렌딩을 해주는 카페가 있으면 좋겠다. 내 자리가 언제나 비어있으면 더욱 좋겠다.

지금은 성당에 가도 아는 이가 없고, 학교를 찾아도 단골 식당은 없다. 여행지를 가도 그때 묵었던 숙소는 사라졌다. 변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하나쯤은 갖고 싶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지탱해 주는 작은 비타민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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