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른을 위한 20분간의 선물 [김수현의 THE클래식]

입력 2021-10-24 06:44   수정 2021-10-24 06:45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스치듯 지나가는 몇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학원이 끝나고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 동생과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 엄마를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면 금세 어둑해지던 길거리,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밀어주던 그네에 살랑거리던 머리카락,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동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손톱이 까매지도록 쌓았던 모래성까지. 오직 나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소소한 놀이에도 마음껏 즐거워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당시의 따스한 공기까지 온전히 느껴지는 듯합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요. 아마 언제 씌워졌는지 모를 어른이라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벗어던지는 시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겁니다. 중년의 고달픔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사회생활 속 젊은 청춘의 힘겨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모두 어른이면 응당 견뎌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마음 깊은 곳에서 곯아갈 뿐이죠. 그러나 나이가 들고 바라던 사회적 위치에 도달해도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까지 스스로 주문해야 하는 현실은 가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래서 오늘은 고단한 삶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며 버티는 우리 어른들에게 20분의 선물을 건네볼까 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 아닌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리는 어른을 위한 음악이라고 작곡 의도를 분명히 밝힌 슈만의 '어린이 정경'은 우리가 찬란하게 빛났던 어린 시절을 조명하는 창이 될 것입니다. 부모님께 근거 없는 생떼를 부려도, 친구와 사소한 다툼에 주먹질하며 싸워도, 형제자매에 대한 질투심에 사랑을 갈구해도 모든 게 용인되던 그때를 떠올리도록 하는 음악,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소개합니다.
슈만,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독일 낭만파 음악가의 대명사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평생의 연인 클라라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던 1838년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클라라가 보냈던 연애편지 중 '나는 당신에게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때가 많은 것 같다'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은 슈만은 곧바로 작곡 작업에 돌입하게 되죠. 그렇게 탄생하게 된 걸작이 바로 피아노 소품 13곡으로 구성된 모음곡 '어린이 정경'입니다. 사랑에 들뜬 28세 슈만이 클라라에게 알려주고 싶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가장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선율로 마음껏 표현한 작품이죠.

말년에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다 숨을 거두는 안타까운 운명에 처하는 슈만이지만, 이때만큼은 사랑하는 연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릴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젊은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슈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사소한 감정까지 온전히 담고자 했던 이 작품은 고난도의 기교를 뜻하는 비르투오시티가 완전히 배제됐는데, 이는 당시 화려한 기교가 대두되는 당시의 음악적 추세를 역행하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만 구사할 수 있는 요소를 과감하게 빼고 기억과 감정이라는 핵심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담백하고도 풍부한 선율로 작품 전체를 채웠죠.

그렇다고 슈만의 작품이 이전까지 존재했던 어린이를 위한 음악과 동일시됐던 건 아닙니다. '다 자란 어른과 어린아이들을 위한 곡'이라고 제시된 부제에서 인지할 수 있듯, 악기를 처음 시작하는 어린이의 교육과 연습을 위해 작곡된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죠. 관련 작품들이 작곡가의 어린 시절 만들어진 곡이거나 잠시 어린이가 등장하는 내용에 그쳤다면, '어린이 정경'은 어른이 된 작곡가가 어렸을 적 세상을 바라봤던 눈으로 다시 돌아가 창작해낸 결과물입니다.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어른에게 바치는 음악인 셈입니다. 이 같은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은 '어린이 정경'이 처음이란 게 음악계 중론입니다.

독창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표현력이 두드러진 탓에 백건우, 손열음 등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에 수없이 등장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죠. 초절기교를 완전히 없애고 슈만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상상력과 서정적인 분위기로 구성된 이 작품은 단순히 연습만으로 소화할 수 없는, 대가들이라도 혹평을 받을 수 있는 난곡 중 하나입니다. 한번 들은 사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선율로 많은 청중에게 애정을 받으나,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연주자 자신의 순수한 동심과 어른으로서 내제된 깊은 감정선이 공존해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가슴 한구석에 어린이였던 나를 숨겨두고 있는 어른을 위해 작곡된 작품 '어린이 정경'. 학교 점심시간 짬을 이용해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마음껏 웃다가, 퇴근길 엄마에게 솜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쓰다가 혼나도, 밤이 되면 자신이 되고 싶은 꿈을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깊은 잠에 빠지던 우리의 어린 날을 생각하며 음악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제는 낯설어진 그때로…빛나고도 아름다운 '아련함' 환기
제1곡 '낯선 나라들과 사람들'. 표제에서부터 느껴지듯 작품의 시작에서 슈만은 어른들에게 이제는 낯설어진 어린 시절로의 초대장을 보냅니다. 힘겨운 현실을 짊어지며 어릴 적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우리의 과거를 낯설다는 단어로 표현하죠. 생소한 감정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음껏 들여다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심정을 이해하듯 말입니다. 물론 음악은 기이하거나 불편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죠. 오히려 어릴 적 엄마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면 따뜻한 햇볕이 비췄던 그때의 포근한 감정을 선사하는 주선율이 흐르죠.

넥타이를 맨 아빠가 출근 전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인사하던 그때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온화한 선율이 계속해서 흐르면 이내 엇갈리는 리듬이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이 규칙 없이 뛰어노는 그때만의 불안정성을 표현하는 듯 재미있죠. 순간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표현하듯 아련한 선율과 느리게 연주하는 리타르단도가 나타나지만 이내 주선율로 돌아옵니다.

그 뒤로는 모든 어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기억을 부르는 순수하면서도 찬란한 선율이 이어집니다. 제2곡 '신비한 이야기'에서는 점음표, 앞꾸밈음 등의 경쾌한 리듬으로 아주 작은 일에도 넘치는 호기심으로 눈망울을 반짝였던 그때를 회상하게 하죠. 제3곡 '술래잡기'에서는 스타카토와 악센트 등의 표현기법으로 친구들과 서로를 잡으며 깔깔대면서도 약간의 긴장감에 땀 흘리던 장면이, 제4곡 '보채는 아이'에서는 부드러운 주선율이 드리우면서 부드러운 엄마의 한 손이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듯 표현됩니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제5곡 '충분히 행복한'은 어릴 적 아주 작은 성취에도 완전하게 기뻐하고 기분이 붕 떴던 진실된 감정을 온전히 담은 곡입니다. 마음속 빛나는 별들이 팔딱이는 듯한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을 상기시키죠. 8분음표, 16분음표의 사용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오른손과 왼손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주선율은 거창한 생각 없이 행복 그대로를 느끼던 어린 날에 머물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기자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감정에 북받쳐 감상을 잠시 멈췄던 곡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내 제7곡 '몽상'의 선율이 나타납니다. 모음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번역 없이 '트로이메라이'라는 명칭 자체로도 불리죠. 첫 선율부터 어릴 적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듯한 온화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슈만의 작품 중 가장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라 불리는 주선율은 나른한 오후 물결에 햇빛이 비치고 미소를 띤 아빠와 엄마가 어린 나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각 성부의 선율과 화성의 상행 진행은 노을에 비친 먼지 몇 점조차 생생히 기억나는 그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형용할 수 없는 아련한 분위기를 형성하죠. 이 작품은 청중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라는 듯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느려지다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제13곡 '시인의 이야기'는 이제 어린 시절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어른의 심정이 고스란히 투영됩니다. 여기서 어른은 청중 자신이기도 슈만 자체이기도 하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눈부신 아름다움이 G장조 주선율을 타고 흐르다가, 이내 e단조 조성으로 변한 차가운 선율이 오른손 독주로 연주됩니다. 회색빛으로 바래는 추억의 순간이 표현되듯 싸늘한 분위기가 연출되죠. 그러나 이내 서운한 마음을 위로하듯 토닥이는 주선율이 다시 흐르고, 점차 음악이 느려지면서 세 개의 긴 화음으로 작품 전체가 막을 내립니다. 이 순간 깊은 여운에 찬 청중들이 한동안 박수를 치지 못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하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작은 행복에도 날아갈 듯 기쁘고 사소한 슬픔에도 마음껏 울 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누구보다 솔직했던 나라는 아이에게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혹독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아닌지. 오늘만큼은 취업준비생으로서의 초조함과 가장으로서의 압박감, 워킹맘으로서의 죄책감 등 우리에게 쓰인 어른이라는 탈을 던지고 온전히 어린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길. 모든 어른이 철없게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내는 그런 날이 되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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