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해갔다. 또한 거듭되는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제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권력 쟁탈전에서 소외당한 세력은 재야세력으로 힘을 기르고, 지방에서 태동한 자생적인 호족세력들이 발호했다. 특히 해안지방에는 상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소 해양세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후백제는 927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의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했다. 또 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겼다. 그 후 주도권을 상실하고,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 935년에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했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결국 1년 후인 936년 고려의 10만 대군과 벌인 낙동강 상류(구미 지역)전투에서 대패한 뒤 멸망했다.

그후 한동안 후백제는 특별한 해군 활동이 없었는데, 932년에 들어서자 돌연 활발해졌다. 9월에 수군으로 고려의 핵심인 예성강에 침입해 지금 북방한계선(NLL) 일대인 연안·배천·정주의 선박을 100척이나 불사르고, 근처인 저산도의 말 300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다시 10월에는 해장군인 상애(尙哀)를 보내 공략했다. 후백제 수군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왕건은 6년간 해로가 막혔다고 한탄했다.
전북 해안지역은 고대에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을 했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되는 입구였다. 변산반도의 죽막동 유적에서 발굴된 중국계, 왜계의 유물은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동진강을 통해 정읍·김제·고창 등 평야지대로 쉽게 연결되고, 군산지역을 통해서는 금강 하구로 연결된 하계망을 이용해 전북과 충남 일대의 깊숙한 곳까지 교통이 가능하다. 백제 등이 사용했던 만경강은 ‘한천(漢川)’을 통해 전주 시내까지 연결된다. 전주는 이른바 해륙교통과 수륙교통의 합류점이었고, 해양 능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견훤은 전주의 이점을 파악하고 수도로 택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주 사람들은 전주가 40년 가까이 후백제의 수도였으며, 사신선들이 발착했던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던 사실을 모른다. 정체성이 부족하면 집단은 자체 분열하고, 외부 집단과 경쟁을 벌일 때는 쉽게 파멸한다. 이 때문에 정체성을 찾고, 왜곡을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갈등처럼 손쉽게 악용돼 집단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후백제’의 등장과 발전은 우리 역사의 분열을 심화시킨 것일까, 아니면 통일을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방어를 맡은 군인이었다. 그의 세력은 백성들의 불만과 옛 백제 땅이라는 민심을 활용해 달포 사이에 규모가 5000여 명에 달했다. 892년에는 자신을 왕이라 칭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