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미국 상장 기업들은 1조7000억달러의 현금을 사내에 유보하고 있었다. 전략적 결정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잉여현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애플은 당시 모든 기업이 납부한 연방 법인세보다 많은 2450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했지만, 2012년 이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업가들은 모르는 위험에 베팅하지 않는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주사위 던지기 게임처럼 승률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내려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 확률은 의심의 대상이 되며 투자수익은 얼마를, 언제 벌 수 있을지 추정조차 하기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아는 악마가 모르는 악마보다 낫다’는 라틴어 속담은 비상식적인 위험회피 성향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라고 정의한다.
행동경제학에서 설명하는 편향들이 결합되면 과도한 위험 회피 성향이 형성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험적인 의사결정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험회피적인 모습을 보이던 기존기업이 엄청나게 모험적인 투자에 뛰어드는 역설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이는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지나친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관련된 예측에 과도한 자신감이 개입되면 고위험, 고수익 사업에 의식적으로 투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댄 로발로와의 공동연구인 ‘소심한 선택과 대담한 예측’을 통해 과도한 위험회피를 초래하는 편향과 지나친 낙관을 야기하는 편향은 서로 상쇄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선택에 직면할 때 위험 회피적 성향을 보이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과 과도하게 정확한 예측 앞에서 선택은 지나치게 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의 사내유보금이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점을 두고 기업이 혁신에 투자하지 않아 일자리 창출 둔화와 양극화가 초래되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사내유보금 가운데 현금성 자산의 비중이 16%가량에 불과하다는 산업계 반론에도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마저 생겨났다. 제도의 적정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 목적은 사내유보금을 경제 선순환의 마중물로 쓰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에서 진단하는 편향에 기초해보면 이런 처방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사내유보금의 합리적인 활용마저 가로막는 극단적인 위험회피 성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업 의사결정자 스스로가 결정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위험 회피를 극복하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더 자주 시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