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5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 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고려의 외교정책을 중국 지역의 상황과 연관 지어 단계별로 살펴보자. 후삼국 시대에 중국 지역은 남과 북에서 15개의 나라가 70여 년 동안 명멸하는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시대(907~979년)였다. 만약 당나라가 존속했다면 통일신라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려는 통일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운인지, 이후에도 중국은 40년 동안 분열이 계속됐다. 만주에서는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947년에는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만리장성 남쪽의 북경 등 지역)를 차지했다.
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때 특사 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인물이 젊은 서희(942~998년)다.
11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과 군사전을 펼쳤다. 고려와 북방의 요나라, 중국 지역의 송나라, 몽골 지역의 서하를 주축으로, 만주 일대의 여진, 일본 등의 주변 세력들이 이합집산했다. 고려는 송과 요나라의 갈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철저한 등거리 외교를 실시하면서 다양한 이익을 챙겼다.
그럼에도 고려는 끝까지 송과 금나라의 충돌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등거리 외교로 평화와 이익을 챙겼다. 고려는 일본과도 교섭을 벌여 통일한 직후인 937년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교섭은 활발하지 않았다. 12세기 후반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면서 전쟁 등의 갈등 때문에 고려에는 위협적이지 못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전략적인 가치가 약했다. 다만 유구국(오키나와)은 무역 상대로서 가치가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양을 중시하며, 무역정책을 권장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송나라를 활용해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무역망에 진입해서 국부를 증대시켰고, 세계 질서에 눈을 떴다.
특히 유학을 비롯해 문인화와 시·도자기 등의 예술, 불교 등을 수입해 문화를 성숙시키는 데 활용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지나친 문치주의는 훗날 고려사회가 약화되고, 멸망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