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쥔 편지·탁자 위 반지…한 폭 초상화에 중세 무역을 담다

입력 2021-12-30 17:04   수정 2021-12-31 02:04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미국의 심리학자 샘 고슬링은 특정 개인과 관련된 장소나 소지품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소유물의 주인이 가진 성격과 감정,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소한 물건들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인생철학과 세계관을 가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사물들은 자의식의 표현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대표 화가인 한스 홀바인(1497~1543)의 걸작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은 사물들이 단순히 실용적인 도구로만 그치지 않고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례를 제공한다.

초상화 속 모델은 런던의 한자동맹 지부를 담당했던 독일 단치히 출신 상인 게오르크 기체다. 상인들의 연합체인 한자동맹은 단순한 상인 집단이 아니었다. 중세 후기 북해와 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이 상업상 목적으로 결성한 세계 최초의 회원 도시 간 자유무역협정으로, 15세기까지 북유럽 무역을 거의 장악했다. 기체를 비롯한 독일 상인들은 런던 사무소와 창고, 상점, 주거지가 있는 대규모 자유 무역지대인 스틸야드에서 한자동맹 규약에 의해 신변 보호를 받고 특정 세금과 관세를 면제받는 등 특권과 자유를 누렸다.

부를 축적한 스틸야드의 독일 상인들은 예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인들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영국에 체류하던 홀바인에게 상인조합 회의실을 장식할 회화와 개인 초상화를 의뢰했다. 상인들의 눈부신 경제활동과 막강한 재력은 홀바인에게 창작의 중요한 소재이자 수입원이 됐다. 홀바인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상인 집단의 후원을 받으며 훗날 미술사에서 ‘스틸야드 초상화’라고 부르는 걸작들을 남겼다.

이 그림은 ‘스틸야드 초상화’ 중 최고 걸작이자 독일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가의 초상화로 꼽힌다. 스틸야드의 역사적 고증 자료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당시 사회상과 생활상을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특히 장소와 소유물들을 통해 인물의 직업, 성격, 취향, 경제력, 인생관까지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초상화 속 기체는 스틸야드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부자임을 과시하듯 반짝이는 붉은 비단옷 위에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검정 베레모를 쓴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해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기체의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물건이 직업, 나이, 출신지, 경제력, 비즈니스 관계, 취향, 지적 수준, 인생관까지도 말해주고 있다. 기체가 이 초상화를 홀바인에게 주문했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로 삶의 의욕이 넘쳤다. 기체의 머리 뒤로 보이는 녹색 나무 벽에 라틴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그림은 게오르크의 얼굴과 외양을 보여준다. 그의 눈과 뺨이 너무도 생생하지 않은가. 1532년 그의 나이 34세에’

기체는 일개 상인이 아니라 성공한 한자동맹의 젊은 사업가였다. 탁자 위에 놓인 한자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가족을 상인으로 식별하는 상징물인 가족 인장(봉인봉)과 인장 반지, 가죽으로 묶은 장부, 필기구와 동전을 보관할 수 있는 상자, 벽에 걸린 저울, 열쇠 등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가 그 증거물이다. 벽에 걸린 비즈니스 서신들은 기체가 세계무역 네트워크를 가진 국제무역상이었다는 것, 그의 손에 쥔 편지는 독일에 있는 형제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체가 성공한 국제상인이 된 비결, 즉 그의 인생관도 그림에 드러나 있다. 배경의 나무 벽에 “슬픔 없이 기쁨도 없다”라는 라틴어로 쓴 좌우명이 보인다. 교역 사업에 따르는 수많은 실패를 극복하고 역경을 성공의 기회로 바꾸는 그의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글귀다. 선반에 올려진 책과 벽에 적힌 라틴어 문구들은 기체가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국제무역상이었다는 것, 값비싼 수입품인 아나톨리아 카펫과 베네치아산 유리 꽃병, 정교한 기술력으로 만든 작은 탁상시계는 그의 재력을 상징한다.

기체가 이 초상화를 홀바인에게 의뢰한 목적도 일상용품을 통해 알려줬다. 꽃병의 카네이션은 약혼의 전통적 상징이었다. 이것은 기체가 결혼을 약속한 독일 처녀 크리스틴 크루거에게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독일 저널리스트 아네테 쉐퍼는 “사물은 자아의 표현일 뿐 아니라 자아의 일부다”고 말했다. 16세기 최고 초상화가 중 한 명인 홀바인은 한 상인의 개인적인 물건들이 자아의 표현일 뿐 아니라 시대적·역사적 유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는 것을 걸작으로 보여줬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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