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민의 굿잡] ① 반지하서 아이 셋 키우던 서른 넘은 가장이 구글에 도전한 이유

입력 2022-02-16 10:00   수정 2023-07-12 11:20

“서른이 넘은 나이에 구글 개발자 입사를 준비했어요. 당시 지하 단칸방에서 아이 셋을 키우는 가장으로선 무모한 도전이었죠. 사실 속으로도 현실가능한 일이라 생각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때의 도전이 제 인생에서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하게 된 겁니다.”

십 수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마치 그때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이동휘(45) 전 구글 소프트웨어 개발자 매니저이자 현 아임웹 CTO 이야기다. 지금이야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한국 소프트웨어 개발자(이하 개발자)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2006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구글 입사에 도전한 이동휘 CTO는 누가 봐도 무모해보였던 도전을 성공 방정식으로 바꿔 놓았다. 꿈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 꿈을 실현해 낸 ‘구글코리아 1호 개발자’ 이동휘 CTO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지난해 한국에 들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으신가요.
“아임웹이라는 스타트업에서 개발 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개발자 채용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이죠. 아임웹은 IT기술을 잘 모르는 분들도 쉽게 전문적인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서비스예요. 아이웹의 특징은 IT기술을 몰라도 누구나 몇 번의 클릭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개발자로 살아온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학교 졸업을 빼면 한 20년 정도 됐네요.”

20년 정도 해보시니 개발자라는 직업, 어떻습니까.
“아직도 배울 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기술이라는 게 컴퓨터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항상 새로운 게 나오니 개발자는 배워야 하죠. 개인적으론 새로운 걸 배우는 데 거부감이 없어 다행이죠. 개발자는 새로운 걸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기 쉽죠. 항상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직업 중 하나예요.”

개발자는 기술 트렌드에 대한 반응이 빨라야 하는군요.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언어를 공부하는지, 그 다음에는 어떤 언어가 나올지를 늘 들여다 봐야하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기엔 이직만큼 좋은 것도 없을 텐데요. 개발자에겐 이직이 좋은 영향을 끼치겠군요.
“물론 회사를 옮기면서 새로운 분야를 접하는 게 새로운 것에 대한 공부이긴 하죠. 하지만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반영해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니까요. 어찌됐든 개발자는 되기 전이나 되고 나서도 계속 공부해야하는 직업이에요.(웃음)”

최근 들어 몸값을 높여 이직을 하는 개발자들이 많이 보여서요. 개발자에겐 이직도 ‘능력’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능력으로 볼 수 있죠. 또 요즘 채용시장에서 개발자의 수요가 많다 보니 기회가 많은 편이기도 하고요. 연봉을 좀 더 준다거나 좀 더 괜찮은 기술을 배울 수 있거나 좋은 리더가 있는 곳이라면 옮길 수 있겠죠.”

개발자로서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는 것과 이직하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궁금하네요.
“음, 개인적으론 새로운 기술을 접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15년을 구글 검색파트에서만 일 했어요. 검색이라는 분야는 세상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은 분야이고, 정보가 있으면 반드시 검색이 있어야 하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보니 늘 새로운 기술을 접했어요. 그래서 저 뿐만 아니라 구글의 많은 개발자들이 저처럼 오래 근무한 분들이 많습니다.”





직무에 관한 궁금증 하나 더 여쭤볼게요. 검색 분야 개발자가 게임 개발자로도 옮길 수 있는 건가요.
“갈 순 있지만 조건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검색분야에선 대규모 데이터와 트래픽을 처리하는 부분이 필요한데, 게임에서도 데이터를 개발하는 분야라면 이직이 가능하겠죠. 다만 쉽게 말하면 검색엔진 파트와 게임 개발 파트는 사용하는 언어나 알고리즘이 좀 다릅니다. 특히 게임 개발자는 기본적으로 게임을 좋아하고 관심이 있어야 하죠.(웃음)”


‘전남 영광 출신, 고3 때 처음 컴퓨터 접해···
컴퓨터공학과 선택했지만 처음엔 적성 안 맞아 학사경고 네 번 받아‘



구글에서 15년 간 개발자로 일하셨어요. 어릴 적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제 고향이 전남 영광인데 워낙 시골이라 어렸을 땐 컴퓨터를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일반고에 다녔었는데, 고 3때 직업학교로 갔어요. 집안형편이 좀 어려웠거든요. 거길 졸업하면 전자기기 기능사 2급을 받을 수 있어서 졸업하고 바로 취업할 생각이었죠. 주로 납땜을 배웠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컴퓨터교육시간도 있었어요. 그때 처음 컴퓨터를 만져봤죠.”

당시엔 컴퓨터가 귀했겠네요.
“80년대였으니까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죠. 근데 당시 컴퓨터 붐이 일어서 좀 사는 집 애들은 컴퓨터가 있긴 했었죠.”

취업에서 대학으로 진로가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담임선생님의 권유가 있었어요. 제가 공부는 좀 했었거든요. 첫 수능세대인데, 수능점수도 잘 나왔고요.(웃음) 1지망을 치의예과, 2지망을 컴퓨터공학과를 넣었는데 2지망이 돼 전남대 컴퓨터공학과로 가게 됐죠.”

대학시절은 어땠습니까.
“영화에서 개발자를 보면 은행도 해킹하고, 컴퓨터로 못하는 게 없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고 대학에 가보니 하드웨어 중심으로 가르쳐주더군요. 저완 너무 안 맞았죠. 자연스레 학교를 잘 안 나가니 성적은 바닥을 쳤고요. 학사 경고를 네 번 맞았어요. 다행이 중간에 마음을 잡아 6년 만에 졸업을 했죠.”

그래도 졸업은 하셨네요. 마음을 잡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방황을 하던 시기에 새로 부임하신 교수님이 계셨어요. 프로그램밍을 가르치셨는데, 새로 오셔서인지 의욕이 넘치셨죠.(웃음) 보통 첫 수업 땐 프로그램의 역사나 개론 수업을 하시는데, 이 교수님은 첫 수업부터 프로그램을 짜오라고 숙제를 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대치를 너무 높여 과제를 내주신 거죠. 근데 그 수업이 너무 어려운데도 재밌더라고요. 과 절반 이상이 F를 맞은 그 수업에서 전 유일하게 A를 받았어요. 교수님도 좀 의아해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그 수업 빼곤 다 F였거든요.(웃음)”





어떤 재미가 있었던 건가요.
“그 수업 전까진 제가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근데 문제가 어려워질수록 붙들고 늘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쾌감이 있더라고요. 뭔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랄까. 그 몰입하는 과정에서 약간씩 성장하는 걸 느꼈어요.”

어떻게 보면 그 교수님이 지금의 ‘이동휘’를 만드신 거네요.
“맞아요. 그분이 지도교수님이 되셨고, 그분 때문에 대학원으로 진학할 수 있었어요. 인생이 전환할 수 있게 계기를 만들어 주신 감사한 분이죠.”


“이십대 중반에 결혼, 아이 셋과 반지하방에 살면서 구글 취업 준비
상황, 조건 다 안 맞았지만 당시 구글은 나에게 꼭 필요한 도전“



대학원 졸업 후 바로 구글로 취업하신 건가요.
“대학원 졸업 후 전문연구요원(병역특례)으로 일을 했어요. 병역특례 기간이 끝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에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거기에다 모든 걸 다 걸고 말이죠.”

어떤 걸 거셨어요.
“제가 결혼을 일찍한 편인데, 당시 아이가 셋이었고 큰애가 여섯 살이었어요. 영등포 신길동 반지하에 살고 있었을 때였고 빚도 조금 있었죠. 일은 하고 있었지만 벌이도, 자존감도 많이 낮았던 시절이었죠. 사실 구글이라는 회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채용은 언제·몇 명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렇지만 그때의 저는 그 도전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아내 분께선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내에게 내가 가장 가기 힘든 곳에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니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을 그만뒀어요. 당장 분유 값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때가 서른 하나였어요.”

물론 ‘도전’이라는 건 좋지만, 말씀하신 상황에서의 도전은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맞는 말씀이죠. 근데 그땐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구글에 붙을 자신이 없었어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럼 구글은 어떻게 준비하신 거예요.
“처음엔 멘붕이었죠. 주변에 구글에 다니는 사람이나 합격한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곳조차 없었어요. 무작정 구글 지원 이메일에 지원서를 보냈어요. 근데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온 거죠. 좋았지만 겁이 났어요. 당시엔 구글의 인터뷰가 너무 어려워 들어가기 힘들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도서관에 있는 전공서적은 모조리 다 갖다 놓고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 세 가지를 정해 ‘어떻게 해결하고’, ‘뭘 배웠는지’를 영어 PPT로 만들어 외우기 시작했어요. 예전 직장 동료들에게 돈가스를 사주면서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했어요. 자기소개를 수정하고 수정하면서 못하는 영어실력으로 달달 외웠죠.”

근데 구글 인터뷰(면접)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는 있었나요.
“몰랐어요.(웃음)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도, 몇 명이 인터뷰를 하는지도 몰랐어요. 사실 지원서를 미리 냈기 때문에 지원자에게 자기소개를 시키지 않아요. 실무 면접하기 바쁘죠. 제가 준비할 수 있었던 게 그거 밖에 없었어요. 근데 인터뷰 당일 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죠.”

어떤 기회였나요.
“면접을 오전 9시에 보기로 했어요. 당시 제 담당 면접관이 중국인이었는데, 서울의 출근시간 교통 체증을 몰랐던 거죠. 9시 15분이 돼도 안 오더라고요. 한 20분쯤 지나니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미안하다며 서류가방에서 제 지원서를 허겁지겁 찾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누군지 5분의 시간을 주면 소개하겠다고 말하곤 연습했던 프레젠테이션을 마쳤어요. 기다리는 내내 떨고 있었는데 제 소개를 마치니 왠지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인터뷰를 마쳤죠.”





지금 복기해보면 구글에 합격할 수 있었던 요인은 뭐라고 보시나요.
“간절함이 아닐까 싶어요. 학벌이나 실력 면에서도 제가 뛰어난 지원자가 아니었을 텐데, 아마 면접관이 저의 간절함을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도 구글에서 수많은 개발자 면접을 봐왔지만 저 같은 지원자는 보지 못했거든요. 아마 면접관도 좀 이상한 놈이다 싶었겠죠.(웃음) 그 이후로 몇 차례 면접을 더 보고 합격 통보를 받았죠.”

합격 소식을 듣고 젤 먼저 뭘 하셨어요.
“가족들이랑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죠.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첫째와 둘째가 대학에 다니고 있고 그 이후로 넷째가 태어났는데 그 녀석이 벌써 중학생이죠.(웃음)”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지=김기남 기자 / 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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