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선생이 6·25전쟁 때 ‘훈민정음해례본’을 피란길에서 내내 가슴에 품고 다니며 지켜내지 않았다면, 빨치산 잔당 토벌을 위해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던 김영환 대령이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다.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도,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인류의 야만적 폭력성이 가장 극렬하게 표출되고 충돌하는 것이 전쟁이다. 그 속에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는 지역마다 걸출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 쾰른을 초토화하면서도 쾰른대성당만은 남겨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이 일본 교토 폭격을 자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경주에 비견되는 고도(古都) 교토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 2001년 3월 아프간을 점령한 탈레반 군사정권의 바미안 석불 파괴는 세계사의 가슴 아픈 오점으로 남았다.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소장품을 겹겹이 포장해 안전한 장소에 숨기거나 지하 카페를 벙커로 개조해 작품을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 미술관 내부에서 직원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품을 지키려는 곳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에서는 도시의 랜드마크인 리슐리외 공작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려 덮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화유산 파괴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달 28일 키이우주의 이반키우 역사·지역사 박물관에선 민속화가 마리아 프리마첸코의 작품 25점이 전소됐고, 러시아군이 공격하는 도시마다 문화재와 예술품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전 세계의 반(反)러시아 문화전쟁은 갈수록 확대되는 모양새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비롯한 친(親)푸틴 인사들의 공연계 퇴출이 잇따르고 있고, 러시아 최고 발레리나로 꼽히는 올가 스미르노바(30)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며 볼쇼이 발레단을 탈퇴해 네덜란드 발레단으로 옮겼다. 평화를 위해 푸틴의 자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전쟁으로부터 어떻게 문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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