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형의 현장노트] 너무나 '비바 베르디' 적인 국립오페라단 '아틸라'

입력 2022-04-10 17:21   수정 2022-04-11 13:32



‘VIVA VERDI’. 지난 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오케스트라의 서곡 연주가 시작되자 무대 커튼 막에 커다랗게 뜬 글자입니다. ‘비바 베르디’ 즉 ‘베르디 만세’입니다. 국립오페라단이 한국 초연한 베르디 오페라 ‘아틸라(Attila)’의 개막 이튿날 공연 현장입니다.

이럴 때 보통 커튼 막에는 작품 제목을 띄우기 마련인데 작곡가를 찬미하는 글귀를 내세운 게 눈에 띄었습니다. 이번 공연의 연출·무대·의상을 맡은 이탈리아 거장 잔카를로 델 모나코의 ‘베르디 사랑’과 함께 작품의 메시지를 명시할 뿐 아니라 무대를 이런 방향이나 색채로 보여주겠다는 연출가의 의지가 읽혔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라 공연을 조금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르디 오페라나 19세기 이탈리아 역사에 밝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비바 베르디‘에는 단순히 문자 그대로 19세기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를 칭송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VERDI‘는 ’Vittorio Emanuele Re D‘Italoa(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축약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비바 베르디‘에는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정치적 희망,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이탈리아의 통합을 염원하던 이탈리아인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베르디는 이른바 초기(1839~1849년) 시절 출세작인 ‘나부코(1842)’부터 ‘레냐노 전투(1849)‘까지, 당대의 시대적 염원을 담은 사극 오페라를 잇달아 발표해 이탈리아의 국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칩니다. 하지만 이런 애국적 사극 오페라들은 베르디의 3대 국민 오페라(’리골레토‘’일 트로바토레‘’라 트라비아타‘)나 셰익스피어 원작 오페라(‘맥베스’‘오텔로’‘팔스타프’)만큼 요즘 무대에 자주 오르지 않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나부코’도 유명세에 비해선 상연 빈도가 낮습니다. 작품의 음악적·극적 완성도를 떠나 시대적·지역적 한계를 지닌 ‘비바 베르디‘적인 주제 의식이 오늘날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아틸라’는 베르디의 초기 애국적 사극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이지만 유럽이나 본토인 이탈리아에서도 드물게 상연되는 작품입니다. 공연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57년간 120여 편을 연출한 델 모나코도 1972년 헝가리 공연 이후 두 번째로 이 작품을 연출하고, ‘현대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중견 지휘자’라는 발레리오 갈리도 이번에 ‘아틸라’를 처음 지휘한다고 합니다.

타이틀 롤인 아틸라는 5세기 유럽을 침략한 아시아계 유목민 훈족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동서 로마제국을 대부분 정복한 후 전쟁터에서 급사한 실존 인물입니다. 아틸라는 유럽에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겨져 문학 작품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원전인 중세 전설 ‘니벨룽겐의 노래’에도 아틀리(Atli)나 에첼(Etzel) 이름으로 나옵니다.

오페라 ‘아틸라’는 유럽 대륙을 휩쓴 아틸라가 아드리아해에 접한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기세를 타고 로마로 진군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틸라에 맞서는 로마 장군 에치오, 아틸라에 아버지를 잃은 아퀼레이아의 공주 오다벨라, 오다벨라의 연인이자 독립투사인 포레스토가 주요 배역입니다. 오해와 갈등 끝에 결국 이 세 사람에 의해 아틸라는 최후를 맞습니다. 아틸라가 전쟁터에서 급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적인 애국심을 가득 담은 허구적 상상력의 사극 오페라를 만들어낸 것이죠.

지휘자 갈리는 ‘아틸라’를 ”이탈리아스럽고 베르디다운 작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대 오페라 연출은 사극의 시대적 배경을 다른 시기로 바꾸거나 은유적인 미장센으로 모호하게 처리해 시대적·지역적 색깔을 희석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연출가 델 모나코는 이와는 반대로 훨씬 더 이탈리아스럽고 ‘비바 베르디’적인 무대를 보여줍니다.



짧은 서곡이 끝나고 커튼 막이 올라가면 감탄이 나올만한 장관이 무대에 펼쳐집니다. 폐허가 된 로마, 지금의 ‘포로 로마노’를 연상시키는 장대하면서도 정교하고 입체적인 무대세트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극은 기본적으로 쇠락하는 로마제국을 은유하는 이 거대한 세트 위에서 배경 영상과 휘장 등만 바꿔 장면을 전환합니다. 마치 포로 로마노에 무대를 꾸며놓은 야외 오페라를 보는 기분도 듭니다. 일부 배경 연출에선 거장다운 솜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 1장에서 2장으로 바뀔 때 거대한 푸른 빛 휘장이 물결치듯 내려와 무대를 덮는데 훗날 베네치아가 되는 극의 배경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이탈리아와 교황, 나아가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극 중 훈족의 왕 아틸라가 섬기는 주신(主神)으로 합창 부분에 자주 등장하는 ‘보탄’과 대비됩니다. ‘보탄’은 원래 게르만족의 주신입니다. 아틸라가 게르만족 영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개종할 수도 있고, 대본가가 훈족과 게르만족을 헷갈렸을 수도 있고,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인(게르만족)을 겨냥한 의도적인 포석일 수도 있지만, ‘보탄’은 이탈리아인들이 보기에 어쨌든 야만족들의 신입니다.

1막 2장, 아틸라가 꿈속의 노인(레오네)을 실제로 대면해 공포에 떨고, 마침내 로마 진군을 포기하는 장면 연출에서 ‘비바 베르디’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게 표출됩니다. 교황처럼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레오네는 무대 오른쪽 위에서 커다란 십자가를 사선으로 치켜들고, 아틸라는 무대 중앙 아래에 납작 엎드린 채 공포에 떨며 노래를 부릅니다. 지팡이를 든 레오네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구도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는데요. 십자가의 권위 앞에 무참하게 무너져버린 보탄의 모습입니다.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우월감이 심하게 표출된다고 할까요. 보는 사람에 따라 부대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본이나 유튜브에서 찾아본 다른 ‘아틸라’ 공연 영상과 비교해봐도 과장된 연출입니다.

디테일한 극적인 연출에서 아쉬운 대목도 있습니다. 거장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조명을 써서 등장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고전적인 연출 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프롤로그 1장 후반부 아틸라(베이스)와 에치오(바리톤)가 밀담을 나누며 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불꽃 튀는 공방이 벌어지는 장면에서도 두 인물의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인물의 연기나 노래에 관객의 몰입을 도울만한 어떤 무대적 장치도 동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오다벨라가 아틸라를 검으로 찌르는 장면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좀 더 극적으로 그럴듯하게 연출할 수도 있는데 약간은 무성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처리합니다.



주요 배역을 맡은 성악가들은 대체로 무난한 가창과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아틸라 역의 박준혁과 에치오 역의 이승왕은 안정된 가창과 호소력 있는 연기로 극을 이끌었습니다. 다만 일부 주역들의 아리아와 합창에서 오케스트라와의 반주 호흡이 썩 좋지 않아 리허설이 부족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틸라‘는 오페라 작품치고는 연주 시간(약 1시간 40분)이 짧은데요. 그렇다고 다른 작품에 비해 극적 구성력이나 플롯의 밀도가 뛰어난 편도 아닙니다. 몇몇 매력적인 합창과 아리아, 중창은 있지만 ‘비바 베르디’에 치우친 연출로는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왜 아틸라인가‘’그럴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국립오페라단이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기 원하는 애호가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외국에서도 보기 힘든 대작을 무대화하는 시도는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창단 60주년을 맞은 올해 국립오페라단의 공연 라인업을 보면 묘한 편향성이 느껴집니다. ‘왕자 호동‘(3월)과 ’아틸라‘, 베르디의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6월) 등 신작(New Production) 세 편과 ‘호프만의 이야기’(9월), ‘라 보엠’(12월) 등 재연(Revival) 두 편입니다.
공교롭게도 신작 세 편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사극입니다. 작년 국립오페라단 신작인 ’나부코‘와 ’삼손과 데릴라‘까지 끼워 넣으면 이런 경향이 더 짙어지는데요. 다양한 레퍼토리를 추구하다가 단기간에 나타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국립오페라단은 대규모 투자가 드는 신작 제작인 만큼 작품을 선정할 때 ’다양성 속의 다양성‘을 좀 더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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