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등 각국 정부가 추진하던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본국 회귀)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공급망에 차질을 빚은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제조업의 국내 생산을 장려했지만, 정작 기업들은 난색을 표한다. 구인난, 치솟는 물가 등으로 인해 본국에서도 기업들의 사업 환경이 녹록지 않아지면서다.
그러나 러시아 전쟁이 상황을 바꾸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서 공장 가동 비용이 가중될 것이란 우려가 커졌다. 유럽 제조기업 임원들은 “러시아 전쟁이 물류난을 악화시키고는 있지만, 에너지값을 생각하면 부품을 본국에서 생산·조달하겠다는 구상은 더욱 비현실적”이라면서 “리쇼어링을 포기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근 유럽 휘발유 가격은 MWh당 111유로로 전년에 비해 7배 치솟았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EY가 코로나19 직후 유럽의 기업 임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0%가 리쇼어링을 고려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실시한 조사에서는 생산시설을 국내로 돌리겠다는 응답자가 20%로 뚝 떨어졌다. 최근 독일 상공회의소가 진행한 조사에서도 유럽 다국적 기업들의 15%만이 생산지 재조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쇼어링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동상이몽 중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제조업체 아디다스의 캐스퍼 롤스테드 최고경영자(CEO)는 "아시아에서 30년 넘게 정착한 공급망을 통째로 본국에다 옮겨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완벽한 착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2020년 아디다스는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미국 애틀랜타와 독일 안스바흐로 생산공정 설비를 옮겨놓겠다는 계획을 취소한 이후 현재도 해당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롤스테드는 리쇼어링 회의론자를 자처하는 대표적인 CEO가 됐다. 그는 "각종 부품을 본국에서 생산하더라도 원자재는 결국 전 세계에서 조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자재 조달부터 부품 및 완제품 생산까지 모든 과정을 한 국가 안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고 어느 단계에서건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롤스테드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시아 노동자들을 대체할 인력을 구할 수조차 없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커니에서 매년 산출하는 2021년 미국의 리쇼어링 지수는 전년 대비 -154를 기록했다. 해당 지수가 마이너스이면 미국 기업의 국내 복귀 흐름이 후퇴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원인으로 미국의 경색된 고용시장이 우선 거론된다. 코로나19 이후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대퇴사'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미국 기업들은 심각한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노동시장의 주축을 이루던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가 코로나19로 조기 은퇴한 영향도 크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 4일 "기업들의 리쇼어링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면서 "노동시장이 과열된 상황에서 미국 본토에서 생산시설을 늘리면 인건비 문제가 인플레이션에 2차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미국 정부의 제조업 부흥책이 인플레이션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미 기업들이 과거 30여년간 인건비가 저렴한 역외생산(오프쇼어링) 전략을 구사한 덕분에 국내 물가가 완만하게 상승했다는 지적이다. 노동부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연평균 인플레이션은 2.4%였다. 올해 3월 미국 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8.5% 급등했다.
특히 "기업들이 코로나19 이전보다 매출 대비 재고 비율을 평균 5% 가량 높게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독일 해운사 하파그로이드의 롤프 하벤 얀센 CEO도 "앞으로 적시생산방식(JIT)보다 재고를 더 많이 쌓아두는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3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일부 국가에서 해외 공급 의존도를 낮추려는 정책적 제안들은 오도된 것이거나 시기상조일 수 있다"며 "공급처 다변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또 "테슬라와 제너럴모터스, 일본 도요타 등이 반도체 등 부품을 쉽게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일각에서는 각국 정부가 공급망을 탄력적으로 확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글로벌 밸류체인을 해체하고 무역 장벽을 높이려 한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경제학자 이사벨 미장은 “리쇼어링은 보호무역주의를 고상하게 포장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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