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586에서 '사자 돌림'으로…현대판 양반전

입력 2022-04-20 00:08   수정 2022-04-20 00:09

조선시대 양반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분노가 치민다. 군자·선비라는 허울 아래 군역과 조세를 면제받고 무지렁이 백성들 위에 ‘허가받은 흡혈귀’(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로 군림했다. 서구 역사 속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사례는 가물에 콩 나듯 했을 뿐, 착취와 약탈이 일상이었다. 특권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그런 양반계급을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의 파워엘리트 집단에서 다시 보게 된다. 좌우 구분도 없다.

장삼이사들 눈에는 문재인 정부의 586 집권세력과 윤석열 정부의 인선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586 패악질이야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무능과 위선, 내로남불과 시대착오로 5년을 허송했다. 정권 이양을 20일 앞두고도 민초와 무관한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에 매진한다. 그 독선과 퇴행은 ‘유교 탈레반(사림파)’에 비유될 정도다. 호언장담하던 ‘20년 집권’이 5년 만에 끝난 것도, 20년간 나눠 쓸 권력을 5년 만에 탕진한 탓일 게다.

윤석열 정부는 다를까. 그런 역주행을 끝내라고 국민이 선택한 정부라면 달라야 마땅하다. 하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대통령 당선인과 총리·장관 후보자 20명 중 대다수가 고시(사시 5명, 행시 5명, 외시 1명) 출신이거나 박사·의사(4명)다. 가히 ‘고시(高試) 정부’ ‘사자 돌림 정부’로 부를 만하다. 고시나 전문직은 국정 운영 실력이야 586보다 낫겠지만 우리 사회 최고 신분증이다. 586이 민주화운동 경력을 30년 넘게 우려먹으며 특권의식에 절었듯이, 이들은 그 자격증으로 평생을 누린다.

그래서 정권 교체가 정권 교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국가 정향(定向)과 가치의 대전환이 아니라 라운드를 거듭하는 현대판 양반집단 간 전쟁으로 비친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아빠 찬스’ 논란부터 그렇다. 자타공인 ‘윤핵관’ 장제원 의원은 “조국 사태와 뭐가 같냐”고 옹호했지만, 국민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자식을 자기 의대에 편입시킨 것부터가 이해상충인데 이게 잘못이란 생각조차 없다. 공직 후보자들의 전관예우성 로펌 및 사외이사 이력도 마찬가지다. 본인 또는 자식이 군대 안 가고, 신용카드 대신 현찰만 쓰면서도 편히 살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한국 정치는 그레고리 헨더슨(한국명 한대선)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갈파한 대로, 중앙권력을 향한 강력한 상승운동의 소용돌이로 각 개인을 휩쓸어가는 구조다. 역사적으로 오로지 관직에 오르는 것만이 ‘학생부군신위’를 면하는 입신양명이고, 가문을 일으키고,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양반에게 정의는 법치가 아니라 유교윤리 실천이요, 경제관은 ‘균분과 안정’이란 유교적 이상 실현이 우선이었다. 일체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관직을 독점하고, 농민의 토지 이탈을 막기 위해 상공업을 억제하고 멸시했다. 아무개 후손이란 것이 특권이 되고, 도덕성까지 세습되는 것으로 여겼다.(김은희 《신양반사회》)

경제 선진국이 됐어도 이런 전(前)근대적 의식구조가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냄비 같은 사회를 지배한다. 공직을 꿰차고, 출세하는 것이 오로지 인생 목표인 이들의 세상이다. 지방도로 곳곳에 나붙은 ‘축 영전’ 현수막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시민운동을 한다던 이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정부 요직을 독식한 것이나, 15년 전 총리가 73세에 다시 새 정부 총리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서울교육감 선거를 보면 두 번이나 분열로 진 중도·보수진영이 단일화를 해놓고도 또다시 3~4명이 난립하는 식이다. 후보단일화 심판이던 전직 교육부 장관까지 뒤늦게 선수로 뛰겠다고 나섰다. 획일화와 학력 저하로 무너진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가치’보다 10조원 예산과 자리 욕심이 먼저인 탓이다.

국회의원이 기업인을 불러 호통치고, 판사가 글로벌 기업의 경영을 훈계하고, 경제부총리가 퇴임하자마자 수십억원 백지수표를 제안받는 나라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질서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법치보다 정실, 공정보다 내 편이 우선이고, 전관예우 먹이사슬이 강고하기 때문이다. 민간 주도 성장, 공정과 상식을 내건 윤석열 정부는 과연 다를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규제 권력을 시장 자율로 넘기는 국가 대개조 없이는 변함없을 것이다. ‘근대로의 길’은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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