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창] "우리가 두드리면 法, 무조건 따르라"는 국회…국가 틀이 흔들린다

입력 2022-05-03 17:10   수정 2022-05-04 07:39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파동을 겪으며 의회 독재, 입법 쿠데타라는 말이 회자된다. 국회는 74년 역사의 형사사법제도와 체계를 한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손바닥 뒤집듯 해버렸다. 주권자인 국민이 배제되고, 정해진 절차가 생략되고, 헌법 정신이 훼손된 날림·부실 입법이다. 고도로 훈련되고 제도적 권한을 부여받은 전문가에 의한 권력 비리와 부패 수사는 이제 물건너갔다. 국민이 유사시 ‘적법 절차’에 따라 충분한 수사 서비스를 제공받는 일도 어려워졌다. 검찰·법원에 의한 ‘사법적 통제’라는 근대형법의 수사 원칙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서다. 상식도 염치도 없이 ‘의원 머릿수가 정의’라고 강변하는 제왕적 입법부가 나라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입법의 가벼움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 입법 강행을 결정한 건 지난달 7일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른팔이라는 한동훈 검사장의 ‘검언유착 의혹’에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린 바로 그날이다. ‘친정권 성향’의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한 2년간 수사에서도 혐의가 나오지 않자 검언유착을 맹비난해온 민주당은 사과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봐주기 수사’ 프레임을 내걸더니 검수완박 역공을 펼쳤고,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 입법이 완료됐다. 공청회 한 번 없이 번갯불에 콩 볶듯 끝내버린 기막힌 즉흥 입법이다. 불과 1년 전에 시작된 검경수사권 조정도 ‘낙제점’이라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는 터다. 그 부작용을 모르쇠하고 수사권 조정의 끝판왕 격인 검수완박으로 폭주한 건 어떤 명분을 붙여도 정당화하기 힘들다.

한국 국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치유 불가 수준이다. ‘정인이법’도 생후 16개월 된 정인이가 양부모 학대로 숨졌다는 TV 보도로 여론이 들끓자 불과 6일 만에 뚝딱 해치웠다. 그 짧은 기간에 함량 미달 법안이 쏟아져 발의안이 37개에 달했다. 정인이법 통과 후 수십 명의 의원이 ‘자신의 공’이라며 공치사하고 나선 배경이다. 하지만 졸속 입법 탓에 구멍이 숭숭 뚫린 법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불과 한 달 만에 재개정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은 입법 테러에 가깝다. 가덕도는 2016년 평가 때 ‘동남권 신공항’ 후보지 세 곳 중 최저점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당은 지난해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특별법을 급조해 전격 의결했다. 정해진 절차를 밟아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던 ‘김해공항 확장안’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가덕도공항은 ‘표’를 최우선하는 여야의 담합 속에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마지막 관문인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확정받았다.
국민보다 자신들을 위한 입법 홍수
20대 국회 4년(2016~2020년) 동안 나온 위헌 법률만 45건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위헌 법률이 한 해 5건 이상 나오는 사례는 없다”(주호영 국민의힘 의원)고 한다. ‘법 나와라 뚝딱’ 식의 법 경시 풍조가 빚은 낯부끄러운 기록이다. 정우용 한국상장사협회 부회장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1주일 만에 입법안이 나올 정도로 부작용에 대한 고려 없는 입법이 남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을 지낸 한 중진의원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법이 아니라 의원들을 위한 법 만들기가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국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갖은 편법과 꼼수를 총동원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민의의 전당에서 민주정치의 원리가 실종됐다니, 분노를 넘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날림 입법은 갈수록 대범해지고 있다.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할 때 사전검토조차 없이 도장만 빌려주는 행태가 일반화됐다. 카톡이나 텔레그램으로 연락받아 법안 이름만 확인하고 공동발의를 승낙하는 방식이다. 20대 국회 법사위원을 지낸 한 여당 의원은 “법안을 읽지 않고 상임위원회에 참석할 때가 많다”고 했다.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상임위 표결에서 해당 법안에 ‘기권’하거나 ‘반대’하는 사례도 목격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회발 입법은 말 그대로 홍수다. 20대 국회 4년 동안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2만3047건으로 20년 전 15대 국회(1996~2000년·902건)의 26배에 달한다. 정부 발의 건수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는데 의원 발의만 수직 상승세다. 전체 법안 중 의원 발의안 비중도 15대 국회 때 59%에서 20대 때는 95%까지 치솟았다.
한 해 입법 건수 英의 71배·日의 20배
의원 발의가 급증한 건 15대 국회 때부터다. 15대 국회가 개원한 1996년은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평가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법안 발의 건수가 평가 핵심 지표에 포함된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어 정당들이 공천 요건에 반영하자 법안 발의는 현역 의원들에게 공천보장용 ‘보험’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내용을 중복하고 쪼개서 발의하거나, 병합 심사를 유도해 입법 반영 건수를 높이는 등 갖은 편법이 판친다. 문구나 표기를 고쳐 개정법안을 발의하는 실적 부풀리기도 넘쳐난다. ‘판명된’을 ‘밝혀진’으로, ‘경과된’을 ‘지난’으로, ‘공익상’을 ‘공익을 위하여’ 등으로 고치는 꼼수들이다.

요즘 국회에서 통과되는 법안은 한 해 2200건 정도로 주요 선진국을 압도한다. 영국의 31건과 비교하면 무려 71배다. 프랑스는 88건, 일본도 112건에 불과하다. 독일과 미국 역시 각각 136건과 193건에 그친다. 의원 한 명이 임기(4년) 동안 통과시키는 법안도 한국이 평균 29.3건으로 가장 많다. 영국은 0.2건, 프랑스와 일본도 나란히 0.6건에 불과하다. 독일 미국 역시 각각 0.8건과 1.4건에 그친다.

한국 국회는 한마디로 ‘발의는 과다, 숙의는 과소’ 상태다. 입법 경쟁이 불붙다 보니 하루에 199건이 통과되는 진기록(2019년 12월 10일)까지 나왔다. 작년 한 해 제정된 법령(법률·대통령령·총리령·부령)은 170개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정부별로 따져봐도 급증세가 뚜렷하다. 규제개혁 차원에서 법령 통폐합에 나선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법령 수는 337개 감소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376개 증가로 반전하더니 문재인 정부 들어선 534개(5월 2일 현재)나 급증했다. 이른바 ‘진보 정부’에서 규제 입법이 넘치는 현상도 주목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원 발의된 규제 법안은 4135건으로 직전 박근혜 정부(988건) 때보다 4배 이상 많다.
“이제부턴 이게 법” 입법 만능주의 폭주
입법은 기본적으로 국민 권리를 제한하고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적 성격을 갖는다. 규제 입법은 특히 기업에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문제다. 인터넷기업협회는 플랫폼 등 인터넷산업에 대한 규제 입법 중 절반 이상이 과잉 규제라는 백서를 연초에 내놓기도 했다. 다른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손바닥만한 술병 라벨 하나에만 8개 부처가 달려들어 총 10개의 벌떼 규제를 가하는 게 현실이다.

덜컥 입법한 뒤 ‘이제부터 이게 법이니 알아서 하라’라는 식의 독선적 입법 만능주의도 극성이다. ‘임대차 3법’도 그런 부류다. ‘투기를 근절하겠다’며 밀어붙인 임대차 3법은 많은 전문가의 우려대로 전·월세 폭등을 불렀다. 주택시장을 3중 가격 4중 가격이 횡행하는 지하시장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무지한 입법부가 서민을 저격하고 만 결과다.

‘강하게 처벌할수록 좋은 법’이라는 식의 형벌 만능주의적 과잉 입법도 넘친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든 뒤 엄벌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니 부작용 속출은 예정된 수순이다. 세계 최강의 처벌 조항을 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 1년간 근로자 사망은 오히려 늘었다. 보여주기식 처벌로 분풀이하는 데 치중한 부실 입법의 뼈아픈 역설이다. 스쿨존 내 교통사고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운전 과실을 음주운전 사망, 강간 등의 수준으로 과잉처벌해 ‘형벌의 양은 책임에 상응해야 한다’는 형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터지며 법의 신뢰를 추락시켰다.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을 보면 입법이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기는커녕 불공정과 부정 확산의 수단으로 타락했다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가덕도공항은 사전타당성 검토에서 비용 대비 편익이 ‘0.51~0.58’로 분석됐다. 이용객이 없어 부실화한 전남 무안공항(0.49)과 별 차이 없는 결과다. 그래도 엊그제 국무회의에서는 예타 면제가 확정됐다. 무리수와 반칙으로 점철된 가덕도 특별법은 대한민국 국회의 저열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선진화의 최대 장애물 ‘제왕적 국회’
잘못된 입법은 큰 사회적 비용을 부른다. 법률이 많아지면 법을 집행하는 관료가 늘 수밖에 없다. ‘불신의 상징’이자 ‘불법의 전당’으로 치닫는 한국 국회는 비대증에 걸린 국가의 암덩어리 같은 존재다. 부실 입법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와도 폭주한다. 억울하면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로 가보라는 식이다. 문명국가에서 보기 힘든 독선적 매너다. 법치주의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아슬아슬한 폭주가 아닐 수 없다.

입법권은 근대국가를 지탱시키는 핵심 권력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국가의 심장”이라고 갈파했고, 로크도 《통치론》에서 “입법부가 무너지거나 해산되면 국가의 해체와 죽음이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의회는 ‘우리가 만들면 법이니 따라야 한다’는 식의 부적절한 사고에 지배되는 모습이다. 자의적이고 강압적인 입법으로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부실 발의로 법안이 철회되고도 반성조차 없다. 여론의 질타를 받아도 ‘진영의 이익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는 그릇된 신념만이 넘친다. 낯 뜨거운 위장 탈당으로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무력화하고 검수완박 폭거를 거든 민형배 민주당 의원이 비장한 어투로 ‘역사’를 들먹이는 게 현실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부분 ‘합법적 선출’에 의해 파괴된다”고 했다. 승리 지상주의에 빠진 ‘선출된 정치인’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삼권분립을 훼손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가 민주주의 최대의 적이라는 지적이다.

지금 한국 상황이 딱 그렇다. 이쯤 되면 국회를 ‘한국 민주주의 파괴의 진앙’으로 불러도 손색없다. 진영의 이익과 스스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싸구려 법을 마구 찍어내는 제왕적 국회가 선진 한국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했다.
■ 헌법학자 김상겸 동국대 교수 "의원 과잉 지원의 역설 마구잡이·부실 입법 불러"
헌법학자인 김상겸 동국대 교수는 의원들에 대한 과도한 지원이 불량 입법을 조장하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입법·형벌 만능주의에 매몰된 의회를 견제하기 위해 시민사회 감시와 국민 모두의 주권의식 강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검수완박’ 사태를 지켜본 소감은.

“국회의 위선과 무지에 실망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찰은 군대처럼 물리력 행사가 본령이다. 경찰의 수사 전담은 부적절하며, 대안이라고 제시한 ‘한국형 FBI’도 위험한 접근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엄밀히 보면 정보 조직인데 제도와 역사가 다른 한국에 접목하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검찰에 수사권을 주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는데도 여당은 검수완박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폭주했다.”

▷한국에서 의원 입법이 많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국회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외국은 의원 보좌진이 1~2명이지만 한국은 10명까지 둔다. 그러다 보니 법에 무지한 보좌진을 중심으로 마구잡이 입법이 이뤄진다.”

▷날림·부실 입법을 막을 방법은.

“입법을 진중하게 대하는 의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수다. 예컨대 ‘전통무예진흥법’은 6~7개 조항이 전부다. 그 정도면 관련 기본법에 넣는 게 상식적이다. ‘의원이라면 제정법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빗나간 공명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시민단체의 감시 강화도 시급하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 일을 시민단체가 고발한 것을 기화로 실각했다.”

▷제도적 개선책은 뭐가 있나.

“법안 발의 최소 기준을 의원 20명에서 10명으로 줄였는데, 20명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 듯싶다. 전문가 참여, 공청회 등 입법 품질 확보 절차도 강화해야 한다. 독일은 법조문이 문법적으로 맞는지 점검하는 절차까지 거친다. 주권 국가의 최종 책임자인 국민의 책임 의식이 부족하다. ‘과잉·부실 입법은 내 권리 침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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