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로 향하는 '에너지 차르' 푸틴의 동진정책 [박동휘의 생각 노트]

입력 2022-05-05 06:00   수정 2022-05-05 07:18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탁월한 에너지 전문가다. 동독 KGB 출신인 그는 지정학과 얽혀 있는 에너지 산업의 파워를 누구보다 잘 안다. 엑손 모빌을 능가하는 석유 생산업체인 로즈네프트는 러시아 최대 국영 기업이고, 가즈프롬 네코프는 겉으론 민영을 주장하지만, 이 회사의 CEO인 알렉산드르 듀코프는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시절 그 도시의 항구 책임자였다. 푸틴을 만나 본 기업인들은 그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생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데에 혀를 내두른다. 2014년에 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재침공은 에너지 전쟁이자, 신냉전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다. 농업 후진국이던 러시아가 밀 생산량을 빠르게 늘린 건 역설적으로 봉쇄의 결과물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 반도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가 단행되고, 그 해 후반에 유가가 폭락했다. 석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루블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소비자들은 치솟는 수입품 가격에 맞닥뜨려야 했고, 자연스럽게 러시아산 상품으로 눈을 돌렸다. 농민들은 제재로 인한 보호 무역의 효과를 누렸다. 러시아의 농업 종사자들은 이 시기에 광범위한 농업개혁을 단행, 결과적으로 밀 생산량을 배가시켰다. 푸틴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의 또 다른 손에 들린 건 세계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원자재다.

'에너지 차르' 푸틴의 동진 정책
미국 워싱턴 정가는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를 수년 전부터 경고했다. 하지만 독일의 지혜로 불리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조차 미국의 신호를 무시했다. 2015년 러시아에서 독일로 가는 두번째 직행 천연가스관인 노르트 스트림2 건설 계획안에 미국이 강하게 우려를 표명하자 메르켈 총리는 “그저 여러 상업적 계획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유럽은 러시아 가스의 최대 수요처이고, 가스관을 설치하기 위한 유럽 선진국들의 기술을 러시아가 활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주도권은 유럽이 쥐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이 틀렸고, 미국의 예측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최근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비보르그에서 출발해 발트해 밑을 지나 독일로 이어지는 첫 번째 직행 가스관의 밸브를 잠갔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은 히틀러를 닮았다. 다른 건 히틀러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서진(西進)의 와중에 동진을 감행해 소련(USSR)과 상호 대학살극을 벌였다. 자원을 분산시켰다. 푸틴의 전략은 명백히 동진이다. 그는 오랜 숙적인 중국을 새로운 가스 판매처이자 반(反)달러 동맹의 강력한 우군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동부 영토를 병합하려는 것은 일종의 성동격서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흑해의 재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아제르바이잔 등을 통한 유럽의 에너지 대안 루트에 압력을 가하겠다는 실용적인 목표 외에 푸틴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크라이나에 확실한 서쪽 방어벽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문(文) 정부의 북한 가스관 구상에 대한 논란
푸틴의 동진 전략에 한반도가 포함돼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와 관련해 2018년 11월 이해찬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꽤 의미심장하다. 국회 당 대표회의실에서 안드레이 쿨릭 주한러시아대사를 만난 그는 “북한에 대한 제재가 풀리면 러시아 가스를 북한을 통해서 우리나라까지 끌어오는 북방경제 계획을 우리 정부가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산 가스를 한반도에 연결함으로써 북한은 통관 세금을 걷고,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산업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더했다. 마치 우크라이나 천연가스관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다. 2005년 말까지만 해도 서유럽으로 수출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 80%가 우크라이나 가스관을 지나갔다.

이해찬 대표가 어떤 배경에서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한을 관통하는 천연가스관이란 구상과 관련해 집권 여당이 진심이었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선 직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올 2월 이해찬 대표 때와 똑같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와 면담한 뒤 공개 발언 말미에 “가능하면 천연가스도 배로 실어 오는 게 아니라 가스관으로 신속하고 저렴하게 도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속단하긴 어렵지만, 러시아의 동진 정책과 문재인 정부식 한반도 평화 방안을 연결하겠다는 계산법이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독일과 유럽의 지난 몇 년간의 에너지 다변화 전략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일을 포함해 유럽은 가스관을 통한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배로 실어 오는’ LNG를 가스로 바꾼 뒤 유럽 내 가스관을 통해 필요한 지역으로 보내주는 처리시설을 계속 짓고 있다. 게다가 LNG는 미국의 최대 에너지 수출 품목 중 하나다. 간혹 푸틴을 추켜세우며 친러 행보를 보여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조차 2019년에 독일의 노르트 스트림2 건설을 제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미국이 러시아발 가스관을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연 우리 정부는 중·러가 주도하는 반미 연합에 진정 동참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에너지 무지로 인한 과대망상이었을까. 그나마 후자였길 바랄 뿐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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