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연극의 옷을 입은 구노의 '파우스트' [송태형의 현장노트]

입력 2022-06-26 20:34   수정 2022-06-27 11:22



공연장에 들어서니 디귿(ㄷ)자 객석 배치가 눈에 띕니다. 대학로의 실험적인 소극장 연극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 주 무대는 디귿자 안이 됩니다. 공연에 따라 디귿자 밖에서, 관객이 앉은 방향의 뒤편에서 극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배우들이 디귿자 안과 밖을 넘나들며 연기를 하는 것이죠. 공연장 안 전체가 무대가 되고 관객은 무대 안에 들어가 극을 관람하는 듯합니다. 관객이 무대의 일부, 극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17세기 이후 서양 연극의 대세로 자리잡은 액자 무대(프로시니엄 무대), 즉 관객이 사진틀을 바라보듯 정면을 응시하며 극을 관람하는 구조가 엄격하게 분리해 놓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뜨립니다.



지난 23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한 서울시오페라단의 오플레이(O‘Play) ‘파우스트: 악마의 속삭임’의 셋째 날(25일) 공연 현장을 찾았습니다. 제목 앞에 붙은 ‘O’Play’가 눈에 띕니다. 공연 전단에 설명이 나옵니다. ‘Opera + Play’, “오페라와 연극을 콜라주한 새로운 공연 형식”이라고 합니다. ‘콜라주’라는 미술 용어를 썼는데 애매합니다. 풀로 붙여서 뒤섞듯이 두 공연 양식을 융합했다는 의미 같은데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전단의 짤막한 ‘음악·연출 노트’에도 나오는데 광의의 오페라에 속하는 징슈필(대표작 ‘마술피리’)이나 오페레타{‘박쥐’), 오페라코미크(개작 전 ‘카르멘’)는 음악과 대사가 함께 공연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의 레치타티보 부분을 아예 음악 반주 없이 연극처럼 대사로 진행하는 것이죠. 이런 수준이라면 새로울 게 없기 때문에 ‘오플레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굳이 새로 지어낼 이유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디귿(ㄷ)자 객석 등 공연장 안 배치를 보니 뭔가 새로운 공연 형태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현대 소극장 오페라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만한 공연입니다. 구노의 ‘파우스트’는 19세기 프랑스의 전형적인 그랑(Grand) 오페라로 공연시간이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작입니다. 공연장인 S씨어터는 300석 규모의 가변형 소극장입니다. 이번 공연처럼 객석을 배치하면 좌석수는 더 줄어듭니다.
작품은 구노의 ‘파우스트’를 해체하고 간추리고 변형하고 재조합해서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소극장 공연 양식에 딱 맞게 붙였습니다. 소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즉흥성과 현장성이 더해지니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음악적 감동과 연극적 재미가 창출됐습니다.

대규모 관현악 편성은 현악 5중주와 두 대의 전자건반(엘렉톤)으로 대체됩니다. 지휘자(정한결)와 연주자들은 디귿자 객석의 비어있는 앞면에 배치돼 극과는 별도로 연주 모습을 공연 내내 관객들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보는 음악’도 ‘포스트모던’한 현대 공연의 한 경향입니다.



연주자들 바로 위 벽면과 양 날개 벽면은 영상이 흐르는 디귿자 스크린으로 활용돼 극의 배경을 이룹니다. 영상은 배경 뿐 아니라 사전 촬영한 배우 연기 모습도 때때로 비춰주는 데 이는 배우들의 실연과 극적으로 연결됩니다. 애칭 ‘그레첸’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가 보석 상자 선물에 홀려 유명한 아리아 ‘보석의 노래’를 부른 후 파우스트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영상의 실루엣으로 이어지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도 현대 공연의 한 기법입니다.



극은 오페라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되 약 90분으로 축약해 재구성했습니다. 연극적인 대사와 연기 중심으로 극을 진행하되 메피스토펠레스가 처음 등장하며 부르는 ‘내가 왔도다!(Me voici!)’를 시작으로 주요 아리아는 거의 빠짐없이 다 들려줍니다. ‘대사 있는 오페라’ 공연에서 종종 행해지는 방식으로 대사는 한국어로, 노래는 원어인 프랑스어로 부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극이 진행되다 보면 금방 적응이 돼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 무대에서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아리아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나 옆에서 실내악의 반주에 맞춰 배우들의 숨소리와 호흡 하나하나 느끼면서 듣는 아리아는 색다르고 특별했습니다. 날것의 생생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소극장 연극의 ‘포스트모던’한 특성인 즉흥성과 유연성을 잘 살린 연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배우들의 동선이 공연장의 구조와 유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관객과의 소통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은 베이스 전태현의 연기가 돋보였습니다. 관객에게 말을 걸고 애드립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역할을 베테랑 배우 못지않게 능숙하게 해냅니다.



이번 공연의 특징 중 하나는 늙은 파우스트 역은 배우 정찬이, 젊은 파우스트 역은 성악가가 맡은 것입니다. 극 중 파우스트가 묘약을 마시고 변신하는 청년의 모습이 극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젊고 매력적인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관객에게 ‘미스캐스팅’으로 비칠 수 있는 ‘실재와 허구의 불일치’를 메피스토펠레스가 일종의 애드립으로 먼저 일깨웁니다. 웃음이 터집니다. 이것도 극적 몰입은 저해하지만 ‘포스트모던’한 연출로 아량 있게 봐줄 만한 재미를 줍니다.

공연 진행요원이자 춤을 추는 무용수이면서 살아 있는 소품 역할도 하는 두 무용수(김하늘·노미진)의 활약도 도드라집니다. 이들이 춤을 추면서 소품을 옮기는 일부 장면 전환 연출은 재치가 넘칩니다.

서사에는 아쉬운 점도 보입니다. 오페라 원작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축약까지 하다보니 더 그렇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파우스트를 쾌락과 방종에 빠지게 하거나, 마르그리트의 어머니를 제거하고 그녀에게 온갖 불명예를 씌우고 영아 살인의 올무까지 던져 놓는 과정이 거의 생략돼 ‘파우스트’를 처음 접한다면 극의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서재가 다시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원작에 없는 내용입니다. 늙은 파우스트는 ‘일장춘몽’식의 한바탕 꿈을 꾸고 깨어난 듯합니다. 그러고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을 권면하는 설교투의 독백으로 공연을 마무리합니다. 독자적이고 독특한 해석이긴 한데 호불호가 갈릴 듯합니다.
이런 식의 ‘닫힌 결말’은 너무 쉽다고 할까요. 엉뚱하기까지 합니다. 구노의 오페라도 그렇고 대부분의 ‘파우스트’ 공연들은 방대한 원작 희곡 중에서 ‘그레첸(마르그리트)의 비극’만 다루는데요. 이후 파우스트가 겪는 온갖 방황과 모험을 건너뛴 채 희곡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제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단순화입니다. 앞서 펼쳐낸 ‘마르그리트의 비극’의 여운을 싹 가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연출에서도 ‘액자 무대’의 관습들을 좀 더 깼으면 더 좋았겠다는 욕심이 납니다. 예를 들어 주요 아리아 장면들이 디귿자 객석의 안쪽에서 펼쳐지는데요. 배우들이 열연하는 표정과 감정을 양 날개쪽에 앉은 관객들은 놓치기에 십상입니다. 영상을 쓴 김에 이동 카메라로 배우들의 모습을 비춰 실시간으로 벽면 스크린에 띄웠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이런 한계와 아쉬움에도 이날 공연은 오페라 명작과 현대적인 소극장 연극 양식을 균형감 있고 재치있게 ‘콜라주’한 데서 오는 재미와 감동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신선합니다. 초연에 그치지 않고 재연과 삼연 등으로 이어져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높여나간다면 서울시오페라단의 훌륭한 레퍼토리가 될 것 같습니다.
덧붙인다면 ‘오플레이’는 대중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오페라를 친밀하게 다가가게 하는 공연 형태가 될 잠재력이 충분해 보입니다. 구노의 ‘파우스트’ 같은 대작들을 소극장에 올릴 수 있는 현대적인 공연 양식으로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바랍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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