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한 정략결혼, 엉망이 된 집…상류층의 어리석음을 꼬집다

입력 2022-07-07 16:51   수정 2023-04-29 18:42

“인간은 스토리를 듣고 보고 말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중략) 소설을 비롯해 영화, 홍보 연설, 브랜드 광고 이미지, 가족이 운영하는 장난감 가게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스토리로 둘러싸여 있다.”

미국 작가 매슈 룬의 저서 《The Best Story Wins》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말처럼 오늘날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 콘텐츠가 됐다.

미술에서도 탁월한 이야기꾼 자질을 발휘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가 있다. 바로 스토리텔링의 선구자이자 탁월한 스토리텔러로 평가받는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다.

호가스는 재미난 이야기가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공감을 얻는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1730년대에 호가스는 시간적 순차 구조로 전개되는 이야기와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한 장면에 압축하고 회화적 특징을 결합한 ‘현대의 도덕적 주제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개발했다. ‘당대 결혼풍속도’ ‘한량의 일대기’ ‘매춘부의 일대기’ 등 여러 편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은 연작은 ‘그림으로 보는 소설’로도 불린다.

지금 소개하는 작품 두 점은 이야기 그림 연작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결혼풍속도’ 6부작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면이다. 이야기는 파산한 백작 가문의 아들과 부유한 상인 계층 딸의 결혼 계약이 성사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백작은 당시 유행했던 호화로운 이탈리아풍 저택을 짓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던 그는 가문과 돈을 맞바꾸는 방법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한편 상인은 자신의 신분을 높여 상류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막대한 지참금을 내고 귀족 가문과 혼사를 맺으려고 했다.

백작과 상인에게 자식의 결혼은 단지 사업상 계약일 뿐이라는 사실은 등장인물의 의상과 몸짓, 실내 물건들에서 알 수 있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백작은 고가의 그림들로 장식된 거실에 앉아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가계도를 가리키며 신랑감이 명문 가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을 과시한다. 통풍에 걸린 백작이 다리에 붕대를 감고 앉아 있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당시 통풍이 육류를 비롯한 값비싼 음식과 술을 즐기는 부유층의 병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한편 상인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장사의 기본 원칙대로 ‘결혼 장사’에서 이익을 남기려고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다. 미래의 신랑과 신부는 소파에 함께 앉아 있는데도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버지를 닮아 허영기가 많은 백작의 아들은 화려한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 상인의 딸은 부인이 될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은 신랑감의 행동에 마음이 상해 울먹이고, 상심한 처녀를 변호사가 위로하고 있다.

호가스는 사랑이 없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불행해질 것이라는 단서를 그림 속에 숨겨놨다. 화면 왼쪽 아래에 사슬로 묶여 있는 두 마리의 개를 통해서다. 정략결혼이 서로의 족쇄가 돼 부부생활을 옭아맨다는 의미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결혼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침내 둘은 부부가 됐지만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몸도 마음도 멀어진 부부는 전날 밤을 각자 따로 보내고 아침에 응접실에서 만나고 있다. 남편은 간밤의 쾌락으로 기운이 다 빠져 의자에 축 늘어진 자세로 앉아 있고 부인도 졸린 얼굴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남편은 간밤에 혼외정사를 벌였다. 불륜의 증거는 다른 여자의 모자다. 개가 남자의 겉옷 주머니에서 냄새를 맡고 여자의 보닛을 꺼내고 있다. 그는 또 방탕한 생활로 매독에 걸렸다. 왼쪽 목의 검은 자국이 매독의 징후다.

부인은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귀족 부인으로 신분 상승이 된 그녀는 상류층의 향락과 사치 문화에 푹 빠져 있다. 저택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새웠다. 광란의 밤을 암시하듯 응접실 바닥에 트럼프와 악보, 악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의자도 넘어진 상태다. 집사의 겨드랑이에 낀 가계부와 왼손에 쥔 청구서 한 뭉치, 한 장만 지급된 계산서는 바닥이 난 재정 상태를 말해준다. 그가 오른손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응접실을 나오는 모습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 상류층의 결혼 문화를 풍자한 ‘당대 결혼풍속도’ 유화 원작은 여섯 개의 연작 동판화로도 제작돼 엄청난 인기를 끌며 대중에게 판매됐다. 당대 시대상,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인과응보의 교훈적인 이야기에 담아 실제 사건처럼 재현한 이야기 그림은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고 문학적 회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태어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이유에서 영국의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은 “호가스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잇는 희극작가”라고 평가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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