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간 독일과 유럽을 이끈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국가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기에 휴가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극한 직업으로 꼽히는 대통령에게 휴가는 격무에서 벗어나 심신을 가다듬는 재충전의 기회다. 새로운 국정을 구상하거나 산적한 현안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일할 때 열심히 하고 휴가 땐 푹 쉬자는 생각”이라는 윤석열 대통령도 다음 주 취임 이후 첫 휴가를 떠난다. 역대 대통령들도 통상 ‘7말8초’에 휴가를 떠났다.
1993년 여름휴가 직후 금융실명제법을 발표하면서 ‘청남대 구상’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낸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6년 7월 청남대로 휴가를 떠났다가 경기도 파주·연천의 집중호우로 하루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IMF 충격으로, 임기 말엔 세 아들의 비리 연루로 휴가를 반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탄핵 정국, 2006년 북한 미사일 발사, 2007년 한국인 피랍사건으로 임기 5년간 세 차례나 ‘관저 휴가’를 보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취임 첫해부터 순탄치 않았다. 휴가 출발 하루 전날인 2017년 7월 28일 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연기됐다. 이후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로, 2020년 50일 이상 내린 폭우로, 2021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잠정 보류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휴가 일정을 잡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8년 여름휴가를 앞두고 참모진에게 “국민 모두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내가 한가하게 휴가를 가는 게 바람직한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청와대를 지킨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휴가를 떠나기에는 마음에 여유로움이 찾아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시간 동안 남아있는 많은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라는 글을 올렸다.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다. 1954년에 신축돼 1960년 하야 전까지 애용했다. 여전히 해군 시설이지만 1990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뒤 2008년 8월 일반에 개방됐다.
돼지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경남 거제 저도(猪島)에는 ‘청해대(靑海臺)’가 있다. 바다의 청와대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면서 해송과 동백이 자생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1972년 박 전 대통령 지시로 대통령 별장으로 지정됐다. 박 전 대통령은 화강암으로 지은 별장 건물을 보고 “너무 호화롭게 지었다”며 경호실을 나무랐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3년 취임 첫해 이 해변에서 ‘저도의 추억’이라는 글을 남겼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통령 별장과 군사시설을 제외하고 개방했다.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가 담긴 ‘청남대(靑南臺)’도 있다.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1983년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춘재(迎春齋)’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3년 뒤 바뀌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여름휴가, 명절 등 가장 많이 찾은 곳이다.
대통령 별장이 사라지면서 대통령의 휴양지는 경호가 쉬운 군 휴양시설로 대체됐다. 외교·안보 관련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 용이하다는 장점 때문이다. 경남 진해 해군 휴양소, 대전의 군 시설 계룡스파텔 등이 있다.
축구 마니아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청남대에서 가족·경호실 직원들과 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80타 골프 실력을 자랑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골프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매일 2㎞ 정도 되는 조깅 코스를 뛰며 건강을 챙겼다. 다리가 불편했던 김 전 대통령은 독서와 산책, 서예를 즐겼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휴가지에서도 라켓을 놓지 않았다.
유난히 휴가 복이 없던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은 관저나 휴가지에서 독서를 했다. 소문난 다독가인 두 대통령은 휴가 때마다 추천 도서를 소개했는데, 국정철학과 정치적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해 ‘독서 정치’라 불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50년간의 현대 한국 정치를 소재로 다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BM을 회생시킨 미국 기업인 루이스 거스너의 경험담을 담은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등을, 문 전 대통령은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진이 집필한 ‘명견만리(明見萬理)’ 소설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 등을 권했다.
서희연 기자 cub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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