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대당 7500달러(약 1000만원·신차 기준)의 보조금을 받는 국가별 자동차 모델 수다. 현대자동차·기아는 주요 자동차 생산국 브랜드 중 미국 정부로부터 단 1개의 친환경차 모델도 보조금을 못 받는 유일한 업체다. 지난 16일(현지시간)부터 시행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충격이다.
이 법에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에서 조립한 전기차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자국생산주의’ 개념이 들어 있다. 내년부터는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간 핵심 광물(리튬·니켈·코발트·흑연 등)과 부품도 일정 비율 북미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조달해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면서 반도체에 이어 전기차·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게 미국의 속내지만, 엉뚱하게 현대차·기아가 가장 큰 유탄을 맞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조지아주에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을 짓는 등 미국에 105억달러(약 14조원)를 투자하기로 한 현대차·기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됐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중국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국내 배터리 3사도 비상이 걸리긴 마찬가지다. 미국과 강력한 경제안보 동맹을 선언한 윤석열 정부의 통상외교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현대차·기아도 노조와 협의해 미국 공장의 전기차 라인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노·사·정 모두 만만치 않은 숙제를 떠안았다.
미국에 19종의 친환경차(수소전기차 포함)를 수출하고 있는 현대차·기아는 모두 탈락했다. 독일 BMW·아우디·벤츠, 스웨덴 볼보 등의 전기차·플러그드인하이브리드(PHEV) 모델은 브랜드당 1~2개씩 보조금 대상이 됐지만, 현대차·기아는 전무하다. 아이오닉 5, EV6, GV60 등 전기차는 물론 PHEV 모델(투싼·싼타페·스포티지·쏘렌토·니로)도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히 지리자동차가 대주주인 볼보의 차종 1개(S60 전기차·미국에서 조립)가 보조금 지급 대상에 든 반면 미국 내 일자리 창출 기여도 1위인 한국 브랜드는 모두 빠지면서 ‘중국 배제’라는 명분과 취지가 무색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 수출이 한창 상승가도를 달리던 중 급제동이 걸릴 위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7개월간 현대차·기아의 전기차 미국 수출량은 3만9484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2% 급증했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덕분에 미국 소비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70.1%)에 이어 시장 점유율 2위(9%)를 차지했을 정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현대차·기아가 전기차 경쟁에서 테슬라를 맹추격하고 있다. 애플을 추월한 삼성과 비슷하다”고 극찬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머스크한테 미안하지만 현대차가 조용히 전기차 시장을 지배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2030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 목표를 323만 대(점유율 약 12%)로 잡았는데, 이 중 미국 판매가 84만 대로 전체의 4분 1을 넘는다. 미국 전기차 시장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2년의 경쟁력 저하만으로도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전기차 가격 할인, 미국 공장(앨라배마·조지아) 전기차 라인 조기 전환, 조지아 전기차 전용 공장 조기 착공 등 세 가지 방안을 동시에 쓸 것으로 보고 있다. 보조금 공백 기간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만큼 출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차는 앨라배마 공장 설비 전환을 통해 친환경차인 싼타페 하이브리드를 오는 10월부터, GV70 전동화 모델을 12월부터 각각 생산할 계획인데, 이를 최대한 앞당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물량이 부족한 만큼 현지 생산 라인 전환 규모를 늘려 아이오닉 5와 EV6 등 인기 차종을 투입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을 전기차 라인으로 바꾸는 데 통상 두 달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인 대응 방안으로 꼽힌다. 국내 생산 물량을 조정하거나 재배치하려면 단체협약에 따라 노조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노조는 최근 소식지를 통해 “미국 투자 약속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미국 전기차 공장 투자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주장했다. 부품업체들의 준비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변수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연산 30만 대)도 조기 착공해 완공 시점을 앞당길 방침이다. 당초 내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5년 상반기 완공할 예정이었지만 오는 10월 착공해 2024년 10월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중국산 부품·원재료 의존도가 높아 비상이 걸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7월 배터리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 수입액 17억4829만달러 가운데 중국 수입액이 14억7637만달러로 84.4%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코발트의 중국산 비중은 81%, 천연 흑연은 89.6%였다.
다만 미국 자동차업계에서도 당장 내년부터 엄격한 배터리 원산지 규제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한·중·일 3국이 배터리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미국 배터리 시장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을 빼면 남는 곳은 한국 업체뿐”이라며 “한국 기업은 중국 광물·부품 의존도가 높아 단기간 내 공급망을 전환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자칫 한국 업체의 배터리를 쓰는 제너럴모터스 (GM) 등 미국 자동차 업체들까지 보조금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11월 중간선거 이후 시행령을 고쳐 IRA 요건을 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탈(脫)중국과 소재·부품 독립을 앞당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CATL 등 중국 배터리 업체의 미국 시장 진출이 봉쇄되면 중장기적으로 한국 배터리 업체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소재·부품 독립은 어차피 가야 할 길인데, IRA가 조금 더 일찍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며 “미래 먹거리 산업인 전기차와 배터리 분야가 소재부터 중국산에 발목이 잡히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와 FTA를 체결한 핵심 광물 생산국 호주 캐나다 칠레 인도네시아 등과 공급망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GM과 포드 등도 한국산 배터리를 많이 쓰는 만큼 미국 자동차 업체를 통해서도 다각적인 설득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인플레이션 감축법
Inflation Reduction Act. 기후변화 대응,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 미국의 법으로, 고물가로 인한 서민 고통을 줄여주자는 취지로 2022년 8월 16일(현지시간) 발효됐다. 기후변화 대응 방안에는 전기차 구매 보조금 확대가 들어 있다. 북미에서 조립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준다. 승용차는 5만5000달러 이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픽업트럭은 8만달러 이하가 대상이다. 소득 제한(1인 15만달러, 부부 합산 30만달러)도 있다. 내년부터는 북미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의 광물·부품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인 배터리를 탑재해야 보조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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