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7년간의 임진왜란 후 조선·일본·명나라 급변기 맞아, 강화 분위기 고조…1811년까지 통신사 9차례 보내

입력 2022-09-19 10:00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 정부와 대마도 사이에는 강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약탈전쟁이 실패한 탓에 무사와 백성들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높아졌고, 토지의 황폐화로 사회의 토대가 흔들렸다. 참전 세력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신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신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조선도 무너진 사회 체제와 왕조의 권위,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또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압박이 시작됐다. 이미 어선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고, 청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공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 배후의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컸다.

두 나라는 실리와 형식을 놓고 조정한 끝에 조선이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 일부 포로를 송환했고,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일본은 쇼군이 새로 등장하면 조선에 고보(통보)하는 사신을 보냈고, 조선 정부는 답방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열두 번이다. 미묘한 정치 행위였지만, 규모가 매우 크고 동아시아 질서에서 파급력이 큰 행사였다. 특히 일본에선 전 국가적인 행사로 꼽혔다. 또한 대마도에는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따로 ‘문위행(問慰行)’이라는 소규모 사절단을 1860년까지 53회나 파견했다.

통신사는 한양에서 출발해 한 달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출항 준비를 마친 뒤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올렸고, 대마도에서 파견된 선원들과 상의해 출항 날짜를 골랐다. 남해안과 대마도 사이는 55㎞에 불과한 좁은 수로지만, 조류가 복잡해 도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와니우라항에 도착한 뒤에 성이 있는 이즈하라(嚴原)로 이동해 도주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대마도를 출항해 39개의 항구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한 후 육로를 이용해 에도(동경)까지 갔는데, 1763년 파견된 조엄이 쓴 <해사록>에 따르면 1만1300여 리에 달했다.

신유한 일행은 3척의 사신선과 식량, 식수, 물자, 상인들을 실은 종선 3척 등 6척에 479명이 승선했다. 이처럼 400~500명의 대인원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비롯해 각 분야의 인재와 기술자 선원들, 그밖에 비공식적인 인원이 포함됐다. 현재 남은 ‘조선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가장 긴 것은 길이 25m인데 580개의 가마, 119필의 말, 480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대규모이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컸지만 행사 경비, 예단, 무역품 등으로 경비 지출이 과다했고, 특히 일본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마도를 출항하면 이끼섬을 거쳐 규슈 북부의 ‘남도(藍島)’에 처음 상륙했다. 1682년에는 무려 1312척의 배와 3141명의 선원이 일행을 영접했다. 물론 지역,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카타를 거쳐 혼슈 남단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 이곳은 외해에서 세또 내해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오사카나 동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대에는 가야인, 백제인,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했던 해역으로서 관련된 유적과 신화, 설화 등이 남아 있다. 김세렴은 <해사록>에 놀랄 만한 사실을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아카마세키(赤間關)의 동쪽 무덤을 백마분(白馬墳)이라고 지칭하면서 김춘추가 일본에 쳐들어오자 화호(和好)를 청해 흰 말을 죽여 맹세한 뒤 묻은 곳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유사한 내용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신유한의 <해유록> 등에도 있다. 1711년의 통신사는 이 해역에서 아난타(인도)상인들을 만나 관찰한 내용을 기록했다. 한려수도만큼 아름다운 풍광에 대해 조선통신사들도 감탄하면서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겼다.
√ 기억해주세요
조선과 일본은 실리와 형식을 놓고 조정한 끝에 조선이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 일부 포로를 송환했고,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일본은 쇼군이 새로 등장하면 조선에 고보(통보)하는 사신을 보냈고, 조선 정부는 답방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열두 번이다. 미묘한 정치 행위였지만, 규모가 매우 크고 동아시아 질서에서 파급력이 큰 행사였다. 특히 일본에선 전 국가적인 행사로 꼽혔다. 또한 대마도에는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따로 ‘문위행(問慰行)’이라는 소규모 사절단을 1860년까지 53회나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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