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금 줘도 車 못 산다" 날벼락…일본서 무슨 일이?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2-09-25 07:33   수정 2022-09-25 11:22


도요타자동차의 랜드크루저는 1951년 처음 출시된 이래 71년째 대형 SUV의 왕좌를 지키는 SUV의 대명사다. 일본인들은 '란크루'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주고도 랜드크루저를 살 수 없게 됐다.


도요타의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의 LX와 NX, 닛산의 전기차 아리야와 스포츠카 페어레이디Z, 혼다의 인기 SUV 베젤도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다.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도요타는 올 여름 랜드크루저 판매를 중지했다.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잘 팔려서다. 주문이 밀려서 지금 주문해도 4년 후에야 랜드크루저를 인도할 수 있다. 몇 년 뒤면 전기차를 넘어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나온다는 시대인데 2026년에 2022년형 랜드크루저를 받을 판이다. 도요타가 차라리 판매를 중단하기로 결론을 내린 이유다.


렉서스와 닛산, 혼다가 인기 차종의 판매를 중단한 것도 차를 고객에게 인도하기까지 1~2년이 걸릴 상황이기 때문이다. 도요타의 중형 SUV '해리어'는 이미 받아놓은 주문을 취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큰 맘 먹고 계약을 하고 설레는 맘으로 차를 받는 날만 기다렸던 소비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차가 없어서 차를 못파는 이런 황당한 상황은 자동차 부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중국의 도시 봉쇄 여파로 중국에서 부품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탓이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해외, 특히 중국 부품 의존도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일본 재무성 무역통계에 따르면 2021년 자동차 부품 수입액은 8194억엔이었다. 2000억엔을 조금 넘었던 2000년에 비해 4배 이상 늘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세계의 공장'이 됐고, 일본도 여러 나라들과 경제연합협정(EPA)을 맺으면서 무역규모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일본이 특히 의존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산 자동차 부품 수입금액이 3227억엔으로 전체의 39.4%를 차지했다. 태국(884억엔)과 독일(599억엔), 베트남(515억엔)의 순으로 부품 의존도가 높았다. 한국으로부터는 463억엔어치를 수입해 6번째로 많았다.

부품이 없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 차를 못 만드는 상황,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최근 도요타가 집중적으로 광고하는 모델이 소형 미니밴 시엔타다. 아반테 만한 차체에 7명까지 탈 수 있고, 자전거도 실을 수 있는 박스형 차량이다. 시엔타 한 대면 111가지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길 수 있다는게 최근의 홍보 콘셉트다.

그런데 111가지 스타일과 별개로 판매 사양은 딱 3종류 뿐이다. 새차를 살 때는 고객이 선루프를 달 지, 시트를 가죽으로 할지, 휠 디자인을 교체할 지 등 옵션을 하나하나 정한다. 도요타의 신형 시엔타는 옵션 사양이 세 가지다.

선택의 폭이 줄어든 대신 고객은 2개월 만에 차를 받을 수 있다. 고객이 '내 취향대로 옵션을 고르겠다'라면 차를 받는데 8개월 이상이 걸린다. 취향을 반영하는 대신 1년 후에야 차를 받을 지, 도요타가 정해준 옵션대로 2~3개월 만에 차를 손에 넣을 지를 정하라는 제도다.

옵션을 최소한으로 압축해 집중적으로 확보한 재고로 차를 최대한 많이, 빨리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고육책이다.

도요타는 이렇게 '옵션 오마카세(맡김)' 시엔타에 '추천 사양차'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달 발매하는 고급 세단 '크라운'에도 추천 사양차 판매방식을 적용할 계획이다. 고객의 반응을 지켜본 뒤 대상 차종을 확대할 계획도 갖고 나왔다. 혼다도 부품 조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한 모델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최대한 많이 파는 '집중 생산생산 차량'이라는 생산·판매 방식을 들고 나왔다.


부품이 없어서 차를 못 만드는 경영환경의 변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생산방식마저 바꿔놓고 있다. 1980년대 세계 시장을 장악하던 미국의 대형 완성차 업체들을 도요타 같은 일본차가 밀어낸데는 생산방식을 혁신한 공이 컸다.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TPS)'이라는 생산방식이 대표적이다. TPS를 구성하는 핵심이 '적기생산(Just In Time)'과 '간판 방식'이다. 적기생산은 각 공정에 필요한 재고를 필요할 때 필요한 양만큼만 공급해 재고를 철저히 줄이는 방식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방식이 '간판'을 사용한 생산 시스템이다. 앞 라인과 뒷 라인이 '어떤 부품을 언제, 얼마만큼 만들어서 주고받을지' 긴밀하게 소통하는 방식이다. 생산을 철저히 시장의 수요에 맞춤으로써 재고를 극단적인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


간판방식은 1956년 미국의 슈퍼마켓을 방문한 도요타의 엔지니어 오노 다이이치 부사장이 체계화했다. 슈퍼마켓을 찾은 소비자가 진열대에서 필요한 물건을 골라 카트에 담으면 슈퍼마켓 직원이 진열대의 상품을 다시 채우는 방식을 자동차 생산공정에 응용했다.

앞 라인(선 공정)은 슈퍼마켓, 뒷 라인(후 공정)은 소비자가 돼 부품을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만 주고 받는다. 복잡한 자동차 생산현장에서 이 방식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모든 생산라인이 서로 생산량, 생산시점, 생산순서, 운반량, 운반시기 같은 정보를 정확하게 주고 받아야 한다.


도요타는 간판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소통함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방식은 다품종 소량생산과 시장의 환경변화에 따른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 포드식 대량생산을 고수한 미국 기업을 압도하는 비책이 됐다.

이렇게 재고를 최소화하는 방식은 도요타 뿐 아니라 일본 기업을 대표하는 생산방식이 됐다.기업이 재고를 얼마만큼 쌓아두고 있는지를 알아볼 때 '재고자산회전기간(재고자산/월평균 매출)'이라는 통계를 쓴다.


일본 재무성의 법인기업통계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재고자산회전기간은 1990년대 1.2개월에서 2000년대 들어 1개월 이하로 떨어졌다. 적기생산의 원조 답게 자동차 업종은 재고를 극단적으로 쌓지 않는 걸로 나타났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직전인 2019년말 자동차 업종의 재고자산회전기간은 0.57개월이었다. 제조업 평균인 1.39개월의 1/3 수준이다. 한달 매출의 절반 조금 넘는 재고만 확보해 둔다는 의미다. 거꾸로 재고가 끊기면 보름 정도 밖에 못버틴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기생산은 부품 공급이 원활할 때는 훌륭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이 단절되면서 '재고를 쌓지 않는 경영'의 부작용이 속출했다. 코로나의 충격에서 급속히 회복하는 세계 시장의 수요를 일본 제조업의 생산상황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2020년 12월에서 2022년 5월 사이 일본 자동차산업의 생산활동은 코로나 이전보다 24% 떨어졌다. 재고가 부족하다보니 일본 제조업의 회복력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느리다. 네덜란드경제정책분석국에 따르면 2020년 12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제조업 상황을 나타내는 세계 광공업생산지수는 3.7% 상승했다. 일본은 1.2% 오르는데 그쳤다.


문제는 공급망 위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장기화하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격렬해지고 있어서다. 그러다보니 재고 극소화의 원조 도요타마저 적기생산 방식을 포기하고 있다. 지난 3월말 현재 도요타자동차의 재고자산은 3조8000억엔으로 1년 만에 32% 늘었다.

일본 제조업 전체의 재고 역시 2020년 1분기보다 31% 증가했다. 특히 자동차와 정보통신(IT) 기계·전자부품 업종이 작년 봄 이후 재고 확보를 서두른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 방식 뿐 아니라 경제 안전보장이 날로 중요해지는 국제정세도 일본 제조업체들의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들어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방 국가나 우방국에서 생산한 부품의 사용을 금지하는 견제·보복 조치들을 주고받고 있다. 지금까지 전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공급망을 구축한 글로벌 기업들은 졸지에 생산체계가 군데군데 끊길 위기에 처했다.

발빠른 일본 기업들이 내놓은 대응전략이 글로벌 생산 체제를 중국과 중국 이외의 지역으로 이분화하는 블록화 전략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1개 였던 생산체계를 미국 등 서방국가용과 중국 등 패권주의 국가용의 2개로 분리해서 운영하는 것이다.

핵심 전자부품인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세계 1위 무라타제작소와 일본 최대 공조회사 다이킨공업 등이 이미 제품 생산체계를 이원화하기로 했다.

일본 대표 산업인 자동차 업계도 블록화 전략에 나섰다. 산케이신문은 지난달 25일 일본 2위 자동차 업체 혼다가 전세계 공급망 체계에서 중국을 별도로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 의존하던 부품 공급을 동남아시아와 인도, 북미 지역에 위치한 생산거점으로 대체해 별도의 독자적인 생산체제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차 가운데 혼다가 가장 먼저 블록화에 나서는 이유는 해외 생산 비중이 가장 높은 업체이기 때문이다. 혼다는 일본이 미국과 통상마찰을 벌이던 1982년부터 해외 생산에 적극적이었다. 혼다의 생산 거점은 일본과 중국, 미국, 멕시코, 타이 등 24개국에 분산돼 있다.

혼다가 지난해 생산한 자동차 414만대 가운데 일본에서 생산된 차량은 63만대로 전체의 15.2%에 불과했다. 나머지 350만대는 해외공장에서 생산됐다. 이 가운데 중국 생산량이 162만대로 전체의 38.8%에 달했다. 미국(83만대)의 두 배다. 부품 역시 차종에 따라 적게는 10%, 많게는 절반 가량의 부품을 중국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패권경쟁이 더욱 격렬해지기 전에 생산체계를 미국 및 유럽용과 중국용으로 나누려는 이유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로는 한국도 일본 못지 않다. 한국 기업들은 어떤 대응전략을 내놓을지 기대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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