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만 알던 베테랑 경매사의 '베스트 오퍼'…그건 사랑이었네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입력 2022-10-02 18:11   수정 2022-10-03 00:17


한 중년 남성이 A4용지 크기의 목판을 집어 든다. 그 위에 쌓인 먼지와 곰팡이를 털어내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멋진 그림. 네덜란드 화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1410~1473)가 그린 ‘어린 소녀의 초상’이다. 강렬하고 독특한 인상을 가진 소녀의 모습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최고의 미술품 경매사이자 감정사인 올드먼(제프리 러시 분)은 이 그림을 발견하자 소장 욕구가 솟구친다. 그래서 그림의 주인에겐 작품이 가짜라고 말하고, 경매 현장에서도 모조품이라 밝힌 채 경매를 시작한다. 자신과 공모한 친구 빌리(도널드 서덜랜드 분)가 작품을 낙찰받고, 그는 그림을 저렴한 가격에 차지하려 한 것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베스트 오퍼’(2014)의 한 장면이다. 베스트 오퍼(best offer)란 미술품 경매에서 나온 최고 제시액을 뜻한다. 인생과 맞바꿀 만한 명작을 만났을 때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을 의미하기도 한다.

올드먼은 평소 여인의 초상화들을 빌리를 통해 낙찰받고 자신만의 비밀 방에 걸어둔다. 살면서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 영향이 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은둔의 여인 클레어(실비아 획스 분)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올드먼에게 이 사랑은 모든 것을 다 걸 만한 최고의 가치로 다가온다. 자신의 인생을 전부 베팅한 올드먼의 ‘베스트 오퍼’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이 영화를 보면 수많은 명작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 보카치오 보카치노의 ‘집시소녀’ 등이 올드먼의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중 가장 부각되는 작품은 크리스투스의 ‘어린 소녀의 초상’이다.

크리스투스는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초기 교육과정도 알려진 게 거의 없지만,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등으로 유명한 얀 반 에이크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투스는 에이크 사망 이후 그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어린 소녀의 초상’은 그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몸을 약간 틀어 앉은 상반신 초상화는 에이크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초상화에선 발견하기 힘든 신비롭고 독특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특히 살짝 흘겨보는 듯한 소녀의 시선은 도도하면서도 도전적인 인상을 준다. 소녀가 입은 고급 드레스, 15세기 부유층 여성이 즐겨 쓴 튜브 스타일의 모자는 인물의 신분을 추측하게 한다. 그는 초상화에 구체적인 실내 배경을 쓴 최초의 북유럽 화가이기도 하다. 이전 초상화엔 장소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바탕의 평면적인 배경이 사용됐을 뿐이다.

그는 그림 속에 여러 소품을 배치해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금 세공인 성 엘리조’는 이 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가운데 남자는 저울로 금을 재고 있다. 그가 금 세공인 성 엘리조다. 성 엘리조가 오른손에 반지를 들고 있는 것은 뒤에 있는 남녀가 신혼부부라는 것을 암시한다. 볼록 거울을 사용해 한가한 귀족들의 모습도 비췄다. 크리스투스는 이를 통해 귀족의 나태함과 성 엘리조의 근면성실함을 대비했다.

영화에서 올드먼과 공모한 친구 빌리는 ‘어린 소녀의 초상’을 낙찰받지 못한다. 올드먼은 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자 빌리에게 크게 화를 낸다. 크리스투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이 장면을 보면 그의 심정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베스트 오퍼’를 제시할 만큼의 감동적인 명작을 만난 적이 있는가. 지금 미술관으로 가 다양한 화가의 작품을 보며,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인생의 명작을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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