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꿈틀거리는 연주…이것이 '바그너 사운드'

입력 2022-10-18 18:13   수정 2022-10-19 11:41


‘신들의 신’ 보탄이 자신의 명을 거역한 딸 브륀힐데에게 무자비한 벌을 내리자, 딸은 눈물로 자비를 호소한다. 브륀힐데는 보탄의 명을 어겨가며 지그문트를 보호한 이유가 아버지의 진정한 속내를 반영한 것이었다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른다. 이때 객석을 향한 브륀힐데와 등지고 있어 관객이 볼 수 없는 보탄의 표정을 라이브 카메라가 촬영해 무대 위에 이중으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띄운다. 사랑하는 딸에게 원치 않은 형벌을 가해야 하는 아버지의 괴로운 표정이 이중 스크린에 굴절돼 더 일그러져 나타난다.

이어 보탄이 브륀힐데에게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심정을 노래할 때 카메라는 무대 곳곳에 놓인 현악기들을 스크린에 비춘다. 콘트라베이스, 첼로 등은 동아줄로 감겨 있다. 최고 신의 권력을 계속 누리고, 신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맺은 온갖 계약과 약속에 속박된 보탄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지난 1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바그너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중 2부 ‘발퀴레’의 3막 중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무대에 설치된 영상 스크린과 악기 소품을 활용한 연출은 관객을 등장인물의 내면으로 깊숙이 이끌었다. 가수들의 뛰어난 가창과 연기, 드라마에 착 달라붙는 음악이 무대 연출과 하나로 녹아들어 예술적 감동을 배가시켰다.

전날(16일) 1부 ‘라인의 황금’에 이어진 이날 공연은 올해 19회를 맞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9월 23일~11월 19일) 초청작인 독일 만하임국립극장의 ‘반지’ 4부작 중 두 번째 무대였다. 만하임극장은 19일 3부 ‘지그프리트’, 오는 23일 4부 ‘신들의 황혼’ 공연으로 ‘반지’ 시리즈를 완결한다.

고대 게르만 설화와 북유럽 신화를 원전으로 바그너가 창조한 거대한 신화의 대서사시인 ‘반지’ 4부작은 공연 시간만 16시간이 걸린다. 국내에서 ‘반지’ 4부작을 연속해서 모두 공연하는 이른바 ‘링 사이클’은 2005년 9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프로덕션(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연출) 이후 두 번째다. 이번 ‘반지’ 4부작은 만하임극장이 새로 제작해 지난 7월 초연한 신작이다. 재연 무대인 대구 공연을 위해 만하임극장 오케스트라와 상임연출가 요나 김 등 출연진과 제작진 220여 명이 내한했다.

16일과 17일 양일 공연에서 무엇보다 청중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바그너 사운드’였다. 지휘자 알렉산더 소디가 이끄는 만하임극장 오케스트라는 바그너에 정통한 악단이다. 자체 오페라 공연뿐 아니라 ‘바그너의 성지’인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에 단골로 초청받아 바그너를 연주한다.

이번 ‘반지’를 연출한 요나 김의 표현을 빌리면 “바그너 연주 근육이 제대로 붙은” 90여 명의 오케스트라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이 생생하고 밀도 높은 합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 튜바 등 금관이 포효할 때는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석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연주하나 싶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풍성한 소리가 났다.

‘반지’ 하면 연상되는 고대 게르만의 자연 세계를 모방한 듯한 사실적인 세트나 의상은 무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현대적이고 상징적인 미니멀리즘 무대 연출이 자리한다. 이는 갖가지 욕망으로 물든 등장인물의 심리와 성격을 관객에게 더 드러내고 각인시킨다. 세트를 대신하는 스크린은 사전에 제작한 극 배경 영상이 아니라 관객이 볼 수 없거나 자세히 보이지 않는 무대 이곳저곳과 인물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띄웠다. 무대의 실제 모습과 스크린의 실시간 영상을 조합해 미학적 효과를 창출하는 시각적 연출이 탁월했다. 바그너 음악극에서 관현악이 이야기의 ‘화자’ 역할을 담당하는 것에 착안해 무대 위에서 각종 악기를 등장인물의 표현도구나 분신(페르소나)으로 활용하는 연출도 참신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창의적인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두 공연에 출연한 가수들은 각 배역에 딱 맞는 연기와 가창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라인의 황금’에서 난쟁이 알베리히 역을 맡은 바리톤 요아힘 골츠와 ‘발퀴레’의 브륀힐데 역으로 나온 소프라노 다라 홉스는 발군의 기량으로 열연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만하임극장의 ‘반지’ 4부작은 절반의 공연만으로도 ‘오늘날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롭게 연출되는 바그너 최대 유산의 가치를 일깨웠다. 앞으로 남은 두 공연도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를 모은다.

대구=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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