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공짜 점심과 화폐의 타락

입력 2022-10-20 17:33   수정 2022-10-21 00:33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100년 전 독일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1921~1923년 사이 독일의 월평균 물가상승률은 300%를 웃돌았고, 2년간 물가는 40배 넘게 치솟았다. 하루에 물가가 두 배로 뛰는 날도 있어 상점의 가격 표시가 매시간 바뀌었다.

초인플레는 전쟁 배상금이 근본 원인이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영국 프랑스 등에 지급해야 할 배상금은 총 1320억 ‘골드마르크(당시 금본위제)’였다. 당시 국민총소득의 3배를 웃도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재정이 빈약했던 독일 정부는 국채 발행을 통해 배상금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인수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배상금 협상 때 영국 재무부 대표로 참석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배상금이 가혹한 데다 통화가치를 하락시킨다”며 반대했지만 묵살됐다.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화폐의 타락’이 시작됐다.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는 아주 위험해 적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사회를 파멸시킬 수 있는 병폐”라고 일갈했다. 저서 <선택할 자유>에서 “1차 대전 직후 러시아와 독일에서 나타난 초인플레는 한 나라를 공산주의화했고, 한 나라를 나치즘 득세하에 몰아넣었다”고 했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과 1976년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권도 극심한 인플레를 잡지 못해 민심을 잃고 결국엔 군부에 무너졌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타락시키는 것”이라는 레닌의 말이 적중한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이 초스피드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인플레의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경제학계는 인플레 원인과 관련해 통화량 증대에 따른 ‘수요 견인 인플레’와 원자재 및 임금 상승 등에 의한 ‘비용 상승 인플레’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프리드먼은 “역사적으로 유가 상승 등이 물가를 장기간 지속적으로 상승시킨 적이 없다”며 “인플레는 언제나, 어디서나 통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산출량보다 통화 공급이 더 빠르게 늘어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통화량 급증은 정부의 과도한 지출 증대가 주범이다. 코로나 시기에 세계 각국은 제로금리에 더해 수백조, 수천조원의 돈을 살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상공인과 실업자 등 피해자뿐 아니라 표(票)를 얻기 위해 전 국민에게 위로금을 뿌렸다. 그때 불어난 통화량이 인플레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인플레는 포퓰리즘이 낳은 괴물이다.

물론 정부가 세금 또는 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면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는다. 재정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민간 지출(수요)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세는 정치적으로 달갑지 않은 방법이다. 그래서 국민 동의가 필요 없는 ‘국채 발행-중앙은행 인수’의 양적완화를 통해 재정자금을 조달했던 것이다.

미증유의 코로나 팬데믹에서 ‘머니 프린팅’이 최후의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당국자들이 화폐의 역사를 모르지 않는다고 보면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 공짜 재난지원금은 고스란히 물가 상승분으로 ‘헌납’했으며, 실질 소득은 더 줄어들고 있다. 인플레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 통화량 증가율을 낮춰야 한다.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이 늘어야 한다. 미국은 기초체력이 튼튼해 금리 인상 가속페달을 밟아도 견딜 수 있겠지만 2~3부 리그 국가들의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고환율(평가절하)에서 체력 격차가 드러나고 있다. 프리드먼이 자주 언급한 속담이 떠오른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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