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서 용변을…" 부끄러움 모르는 그 사람의 정체는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2-11-05 09:00   수정 2023-04-27 16:22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벨탑입니다. 하늘에 닿으려고 쌓았는데, 분노한 신이 인간들을 온 땅에 흩어 버렸다는 그 유명한 건축물이죠. 이 바벨탑을 그린 그림 중 최고로 손꼽히는 게 피터르 브뤼헐(1525년경~1569)가 1563년 그린 이 작품입니다.


척 보면 탑은 꽤 웅장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엉망입니다. 탑은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올라가고 있고, 아래층을 다 쌓기도 전에 위층을 짓고 있습니다. 그림 곳곳에서 보이는 모습도 정상이 아닙니다. 컴퓨터 이미지로 자세히 보긴 어렵습니다만, 실물 그림이 상당히 크니(가로 114cm, 세로 155cm) 기회가 되시면 직접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왼쪽 아랫부분에 그려진 권력자와 착취당하는 민중도 눈에 띄지만,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건 시냇가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옛날에 이런 일이 잦았다고 하더라도 그림에까지 굳이 그려넣은 건 화가의 뜻이 따로 있다는 얘기죠. 실제 풍속을 그린 것도 아니고, 성경 속 일을 모티브로 재창작한 거니까요. 근처에 사람도 지나가는데 거침없이 엉덩이를 내놓고 큰 일을 본다는 것, 바로 도덕이 무너지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를 비판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화가 브뤼헐’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만도 총 넷이나 있었습니다. 바벨탑을 그린 대(大) 피터르 브뤼헐, 큰아들이자 동명이인인 소(小) 피터르 브뤼헐, 작은아들인 대(大) 얀 브뤼헐, 작은아들의 아들인 소(小) 얀 브뤼헐이 바로 그 ‘브뤼헐들’인데요. 머리 아프시죠.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 훌륭한 화가 집안입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 최대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변화의 중심 플랑드르, 네 명의 화가 브뤼헐

아시다시피 서양에서는 부모의 이름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2세, 3세…. 하는 식으로 구분합니다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헷갈리는 게 사실입니다.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ㅇㅇ세들이 대표적입니다. 브뤼헐도 그런 사례인데, 하필이면 같은 화가 집안의 가족들이라서 구분하기 더 어렵습니다. 발음도 복잡해서 브뤼겔, 브뢰헬 등으로 알고 계셨던 분들도 꽤 있을 겁니다.

가장 유명한 브뤼헐은 ‘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입니다. 그는 당대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농민의 생활 장면이나 전통 풍습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겨서 ‘농민 브뤼헐’이라고도 합니다. 1565년 그린 ‘눈 위의 사냥꾼’은 겨울 풍경화의 최고봉으로 꼽힙니다.

그는 사회 풍자적인 그림도 많이 남겼습니다. 당시 플랑드르 지역은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로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스페인과의 전쟁, 신교와 구교의 종교 대립, 사회 구조의 급변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벨탑은 이런 사회상을 꼬집은 그림입니다. 기우뚱한 탑부터가 균형감각을 잃은 사회를 상징하죠.

‘맹인들의 우화(1568)’도 비슷한 주제의 그림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는 성서(마태복음 15장 14절)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사람들이 무능한 사회 고위층과 선동가들에 이끌려 다니는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했습니다. 가장 오른쪽 넘어진 맹인은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고요.

그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의 이름은 자신과 같은 피터(1564~1638, Pieter Bruegel the Younger), 둘째 아들의 이름은 얀(1568~1625)이었죠. 둘 다 화가가 됐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화풍을 따라 여러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괴물과 악마들이 나오는 지옥의 모습도 많이 그렸죠. 한편 둘째 아들(얀)의 아들도 아버지와 똑같이 이름이 얀(1601~1678)이었는데, 다들 훌륭한 화가였습니다만 너무 많이 얘기하면 헷갈리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대 피터르 브뤼헐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브뤼헐이 둘째 아들인 얀 브뤼헐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첫째와 달리 둘째는 나름대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얀 브뤼헐은 당대 왕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고, 유럽 최고의 미술 거장인 루벤스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꽃 그림을 특히 잘 그려서 별명이 ‘꽃의 브뤼헐’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많이 헷갈렸던지 형과 구분하기 위해 ‘천국의 브뤼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옥의 브뤼헐’이 된 형 입장에서는 좀 섭섭하긴 했겠죠.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은 얀 브뤼헐의 꽃 그림 중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와 있는 작품이죠. 생생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담은 그림입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실제로는 꽃을 이런 식으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꽂을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이 꽃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피는 꽃들입니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상상 속의 꽃병이라는 뜻입니다.

얀 브뤼헐은 실제 꽃병의 모습을 보고 그리지 않고, 여러 종류의 꽃을 하나씩 그려본 뒤 이를 결합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사계절 꽃을 한눈에 보고 싶어 하는 ‘고객들’의 취향을 맞췄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실 여기엔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닥에 있는 떨어진 꽃잎, 무당벌레, 메뚜기, 파리 등 벌레들을 보시죠. 이는 어떤 생명이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번 지나면 시들고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입니다. 화려하게 피지만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을 인생에 비유해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표현한 거죠.

이런 뜻을 알고 보면 왼쪽 중간에 있는 어두운 회색과 푸른색의 큰 꽃(검은 붓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희귀한 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예쁘지 않고 색도 무거워서 정물화에서 보통 잘 다루지 않는 종류의 꽃이거든요. 얀 브뤼헐은 이 꽃을 통해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듯합니다.


사실 이번주 기자 코너로는 유럽 왕족의 개인사를 다룬 또다른 기사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사의 충격이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지금 상황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미술이든 역사든 현실과 연관될 때 그 의미가 커지니까요. 이번 주제를 죽음이나 사회적 문제를 다룬 브뤼헐들로 정한 건 그 때문입니다.

비난할 대상을 지목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번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모두 함께 잘못된 것들을 고쳐 나가야겠죠. 대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맹인들의 우화'가 비판하는 문제점 같은 것들을요.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유족분들께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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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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