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필리핀 보물 지키자"…안경 렌즈가 된 조개껍데기

입력 2022-12-08 16:39   수정 2022-12-09 01:55

필리핀 바다에는 ‘카피즈’라는 이름의 조개가 산다. 지구 유일의 투명 연체동물이다. 크고 납작하며 현지에선 ‘램피롱(LAMPIRONG)’이라고 불린다. 카피즈 조개는 자연이 빚어낸 유려한 색채와 얇은 두께 때문에 오랜 시간 조명 장식과 보석 재료, 벽지와 가구 등에서 많이 쓰였다. 19세기 스페인 점령 기간엔 카피즈 조개가 미닫이 창문에 유리 대용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카피즈 조개는 미적 가치 외에 바다 환경에도 크게 기여한다. 플랑크톤과 유기 폐기물을 잡아먹어 1시간에 최대 40L의 물을 정화한다. 그런 카피즈 조개의 개체수가 최근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적인 감소는 물론 어업기술 발달로 무분별하게 어획되고 있어서다. 필리핀에선 연간 수백t의 카피즈 조개가 잡혀 쓸 만한 껍데기는 비싸게 팔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려지고 있다.



벨기에의 사회적기업가 셉 베르붐(32)은 사연 많은 카피즈 조개로 안경을 만든 디자이너다. 그는 ‘라이버블(Livable)’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세워 페루, 인도네시아 등 환경 이슈가 있는 지역에 찾아가 대표 토산품과 생물을 활용해 예술작품을 만든다. 정부 부처, 기업과 손잡고 지속가능한 상품을 제작하고 환경 문제와 관련한 이슈를 던진다.

베르붐은 2020년 바다 생태계를 지키고 카피즈 조개를 보호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안경을 만들기로 했다. 원래 카피즈 조개가 안경 렌즈로 쓰였던 역사에 착안한 것. 베르붐은 세계 유명 안경 제작사에 협업 제의를 했지만 이를 유일하게 수락한 건 국내 안경 제작 스타트업 브리즘이었다.



브리즘은 빅데이터와 3차원(3D) 스캐닝 기술로 개인 맞춤형 안경을 제작하는 회사로, 베르붐과 함께 ‘카피즈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다. 베르붐은 “안경 렌즈로 활용된 카피즈 조개의 본래 가치를 되살리고 안경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함께할 파트너가 필요했다”며 “정교한 설비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브리즘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도전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카피즈 조개껍데기 렌즈와 어울리는 고전적인 골드 컬러의 원형 금속 안경테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완벽해야 했기 때문이다. 얇은 조개껍데기를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가장 난제였다. 브리즘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조명권 실장은 “티타늄 레이저 커팅 기술로 형태의 한계를 극복했고, 3D 프린팅 기술로 렌즈를 잡아주는 단단한 구조를 갖출 수 있었다”며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2만4000명에 달하는 개인 맞춤형 안경 제작 경험으로 새로운 소재의 안경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르붐과 브리즘의 협업으로 완성된 카피즈 프로젝트는 2020년 프랑스에서 열린 ‘비엔날레 인테리어’와 이듬해 ‘영 컬러스 엑스포 릴’에 참가해 호평받았다. 유럽 주요 디자인 매거진이 인정한 ‘올해의 프로젝트’로도 여러 차례 선정됐다. 지난 9월 벨기에 브뤼셀 디자인페어에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100개 한정으로 제작했던 콘셉트 제품 이후 구매 문의가 많아 얼마 전부터 추가 생산분을 베르붐의 라이버블 월드 홈페이지에서 판매하고 있다.

“수많은 공산품 틈에 살면서 우리는 성공과 이익의 기준을 경제적 가치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웰빙, 그리고 이와 연결된 환경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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