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민주주의, SNS 여론전에 취약하다"

입력 2022-12-09 18:25   수정 2022-12-09 23:54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두 명은 모두 언론인이었다. 러시아 기자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필리핀 기자 마리아 레사. 언론인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건 1935년 독일 기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86년 만이었다. 당시 오시에츠키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지금은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다고 여겨진다. 가까운 시일 내에 소셜미디어가 언론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노벨위원회는 왜 오늘날 다시 언론의 가치를 주목했을까.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는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에서 독재정권이 소셜미디어를 악용할 때 민주주의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뒤 미국으로 이주해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레사는 연구를 위해 필리핀으로 돌아왔다가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필리핀이 민주주의 국가로 살아남느냐 아니냐는 언론의 힘, 투명성, 신뢰성에 달린 문제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언론에 몸을 담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레사는 CNN 기자로 아시아 지역을 취재하고, 필리핀 최대 방송사 ABS-CBN의 대표를 지냈다. 현재는 2012년 여성 언론인과 공동 창업한 온라인 언론사 ‘래플러’를 이끌고 있다.

그의 기자 생활은 곧 ‘필리핀 독재정권과의 전쟁’이었다. ‘두테르테 저격수’로 통하는 레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치안을 핑계로 인권 유린을 저지르는 실태를 지속적으로 고발해왔다.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은 마닐라를 배트맨 없는 현실 세계의 ‘고담시’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레사는 처음에는 소셜미디어에서 희망을 찾았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생중계, 시민과의 소통이 독재정권을 견제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거라 낙관했다. 그러나 레사는 소셜미디어에서 허위 정보가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로 확산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 같은 ‘정보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목격하며 토로한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천 갈래로 찢겨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레사와 동료들은 집요한 취재를 통해 공격의 배후에 광적인 정치 팬덤, 봇(자동화 프로그램), 가짜 계정 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레사는 페이스북에 가짜 계정의 위험성을 알렸지만 메타(페이스북 운영회사)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았다.

레사는 독재정권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래플러가 미국인 소유 기업이라는 허위 정보를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레사를 협박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레사와 래플러를 향해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공격이 벌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레사는 2018년부터 거리를 걸을 때면 방탄조끼를 입는다고 한다. 정부는 래플러의 운영 허가를 취소하기까지 했다. 레사에게 사이버 명예훼손, 탈세, 증권 사기 등의 여덟 가지 혐의를 덮어씌웠다. 이 같은 혐의들의 최대 누적 형량은 100년에 달했다.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레사는 거꾸로 동료 기자들과 국민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독려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언론의 자유는 여러분이 시민으로서 가진 모든 권리의 토대입니다. 우리가 권력에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치·사회 시스템이 낙후된 개발도상국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언론사가 소셜미디어나 포털 사이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 이 플랫폼들이 여론전에 활용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권력자가 언론의 질문을 회피하는 모습도. 레사는 이렇게 썼다. “잊지 말기를. 우리가 가는 길을 당신도 가게 될 수 있다.”

레사는 “민주주의는 취약하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기술에 책임을 요구하고, 언론의 탐사 보도 기능을 보호하고 키우며, 언론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포기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우리 세계가 파멸하도록, 우리의 후손이 조종당하도록, 지켜야 할 가치가 파괴되도록, 이 세상이 황폐해지도록 돕는 셈이다. 우리는 실존의 순간에 와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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