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한반도, 뒤늦게 도착할 20세기 마지막 대실험

입력 2023-01-26 17:51   수정 2023-01-27 10:10

매년 1월 1일 아침 똑같은 일을 한다. 새로 모인 자료와 변화를 반영해 한반도 통일을 다시 전망한다. 한 번은 소설가로서, 한 번은 비평가로서, 한 번은 한 인간으로서 한다. 세 가지 정체성은 각각 꼭짓점이 되고 그 분석들이 이어져 삼각형을 이룬다. 남한의 북한 흡수 통일 이후의 ‘수많은’ 역경을 그린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과 논픽션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를 쓰고 난 뒤부터 가지게 된 내 새해 첫날 루틴이다.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그 순간까지 없었다. 정말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금지어로 지정한 동독 정부는 6월 천안문 학살이 터지자 중국을 지지했다.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최고 권력자 에리히 호네커는 “사회주의의 승리!” “행복한 동독이여 영원하라!”를 외쳤다. 로타르 슈페트 전 서독 주정부 총리는 “당시 서독 정부는 소련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온갖 대비를 다 했지만 장벽 붕괴는 논의 자체가 없었다. 상상조차 못 했고 대책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서독 연방정보부, CIA와 KGB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날 저녁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동독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외국여행 자유화는 언제냐는 기자 질문에, 어리바리하다가 “즉시(sofort). 지체 없이(unverzuglich)”라고 말실수를 내뱉는다. 그러자 동독 국민들이 그 즉시 지체 없이 동서 베를린 경계의 검문소로 몰려가 ‘장벽(Mauer)’을 무너뜨렸다. 엉겁결에 냉장고 문을 열자, 코끼리가 냉장고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바보’ 샤보프스키가 냉장고 문을 연 이유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고 그중에는 술이 덜 깨서 그랬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물론 독일 통일은 도도한 시대적 조류(潮流)와 누적된 역사적 연기론(緣起論) 속에서 이뤄졌지만, 그 촉발은 ‘블랙코미디’였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부부를 총격해 죽인 19세 청소년은 자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감옥에서 듣고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역사는 재즈(JAZZ)가 되어 흘러간다.

‘넓은 의미의’ 주사파 국회의원들조차 요즘은 통일하자는 얘길 안 한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북한의 보전과 ‘남한의 중국화’다. 그러나 통일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갑자기 찾아올 것이다. 북한은 중동이나 아프리카라면 몰라도 동북아 첨단에 박혀 있는 한 존속 못 한다. 다만 누가 블랙코미디의 주인공을 맡을지는 미정이다. 독일 통일은 외교로 성취됐지만 한반도 통일은 굉장한 군사적 위기를 동반할 것이다. 그 하중을 이겨내는 실력과 배짱이 대한민국에 없다면 북한 지역을 중국에 뺏길 것이다. 이는 김정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8년 평양을 방문한 폼페이오 CIA 국장에게 통일 후에도 자신은 중국을 막기 위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한을 먹은 뒤 미국과 손잡는 것은 김정일 이래로 북한의 당연한 속내다. 현재 베트남과 미국은 사실상 대(對) 중국 군사동맹이다.

어렵게 성취한 통일 대한민국은 자연재해 같을 것이다. 경제보다 더 큰 난관은 남과 북 출신 간의 ‘증오(hate)’인데, 진정한 통합은 북한을 기억 못하는 세대끼리에나 가능하겠지만 문화예술과 교육이 그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개혁들은 통일 준비의 부분집합이다. 가령, 통일 대한민국에서 북한 출신 노동자들을 가장 괴롭힐 존재는 기업이 아니다. 민노총이다. 정의당이 집권하는 길은 ‘주사파적인 것들’과 결별하고 유럽형 사회민주당으로서 북한 출신 유권자 2500만 명을 수렴할 미래 비전을 키우는 것이다. 독일의 인구와 프랑스의 군사력, 영국의 영토,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공짜일 리 없다. 통일 대한민국 국민들이 감수해야 할 도전의 시스템을 면밀히 만들어놓아야 한다. 매년 첫날 내가 그리는 삼각형은 시간이 갈수록 세 꼭짓점들이 서로 가까워져 하나의 점이 되려고 한다.

내가 서구의 사회학자라면 한국으로 올 것이다. 세계사는 마무리 짓지 못한 자신의 20세기를 이 한반도에서 혹독하고 찬란하게 실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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