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정치가 소프트파워 망칠까 두렵다

입력 2023-02-08 17:35   수정 2023-02-09 00:31

“미국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 단일한 국민적 정체성(identity)은 일반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인종 문제, 분열과 분단, 양극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미국을 놓고 정치학자 새뮤얼 골드먼이 <내셔널리즘(국민국가주의) 이후(After Nationalism)>를 통해 내린 진단이다. 내셔널리즘 하면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정체성 이미지가 바로 떠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는 신선한 주장이다. 골드먼은 하나의 내셔널리즘 잣대로 억지로 통합을 이루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마다 다른 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지역 공동체를 통해 활발한 실험과 해법을 모색하고 확대하자는 게 그의 제안이다.

단일 민족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치적 분열과 세대 간 등 다양한 갈등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서구의 소프트파워”라고 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한국이 가진 3대 소프트파워로 K팝 등 문화, 합리적 경제·외교정책과 더불어 민주주의 가치를 들었다. 한국에서는 누가 선거에서 이길지 모를 정도로 권위주의 국가들과 다르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21세기 한국에서 여당 대표 경선이 초등학생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민주주의 실험장이자 본보기가 돼야 할 정당 선거가 ‘다름’ 자체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채찍(강제와 위협)과 당근(대가와 회유)만 난무할 뿐, 공감·비전·소통의 소프트파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과거로 가는 시대정신도 문제다. 21세기 정치가 툭하면 1960~70년대 박정희를 소환한다. 경제 위기에서 오는 향수를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과거와 현재를 동렬로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완전히 다르다. 예측하지 못한 위기로부터의 리질리언스(회복력)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향한 유연한 적응이다. 과거로 돌아가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당장 정부가 인재양성 전략회의를 열고 쏟아내는 계획만 해도 그렇다. 개인(인재)을 특정 부문에서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단위’로 보고 양성한다는 ‘관료적 교육주의’가 여전히 판을 친다. 1960~70년대는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유효할 수 없다. 개인(인재)을 전체를 구성하는 단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하나의 ‘생태계’로 보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다. 자율성과 주체성은 기본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과 공존할 더 높은 창의성이 더해져야 할 상황에 수요와 공급을 억지로 맞추는 식의 인재전략이 먹힐 리 만무하다. 오히려 개방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재를 유치할 수 있다면 한국의 다양성이 높아지고 소프트파워도 올라갈 것이란 나이 교수의 처방이 21세기적이다.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동원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는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를 만나 등을 두드려 준다고 감동하는 권위주의 시대가 아니다. 과학기술자들은 자율성과 다양성, 실패의 자유를 원한다. ‘관료적 과학주의’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를 리드하고 창조하는 분야가 나올 리 없다. 민주주의, 비즈니스의 자유와 함께 과학기술은 번영으로 가는 핵심 소프트파워다.

권위주의가 단기 목표 달성에 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국가 리스크가 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권위주의 국가의 하드파워가 세계의 위협이 되고 있다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저력을 믿는 것은 그들이 갖지 못한 소프트파워 때문일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소프트파워다. 미국은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어떻게 지키고 키울지 고민하겠지만, 문제는 한국이다. 밑바닥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가 애써 키워온 소프트파워를 망치면 경제도 안보도 사상누각이다. 바로 국가 위기다.

보수든 진보든 국민은 오만과 독선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려면 왜 정권을 잡겠다고 했는지 초심으로 돌아가라. 대선 공약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을 야당이 정권을 잡아 똑같이 하고 있다면 뭐라고 할지, 정권이 끝난 뒤 국민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싶은지 자문해 보라.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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